한글전용과 한영번역

벌써 반세기 이상 한글전용 정책이 시행되어 왔고 이제는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상태라 한글전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 왕따가 되기 십상이겠지요? 저도 한글전용 세대에 속합니다. 중 2 때부터 교과서에 한자가 없어지고 고등학교 때는 한문 교과서가 따로 있어서 三人行 必有我師焉(세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등 구절을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입시(당시 예비고사 + 본고사 시대였음)에는 여전히 한자를 알아야 했기에 별도로 한자를 학습한답시고 부산을 떨어야 했습니다. 그 후 문과생들은 대학 중간고사 기말고사에 한자를 섞어 써야 감점되지 않거나 가점을 받을 수 있었고 또 회사에서 기안, 보고서 작성 시 조금 과장하면 토씨 빼고 문서 전부를 한자로 쓰도록 강요받기도 했었지요. 그러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한자 쓰고 읽기에 익숙한 편입니다.

그러나 제목으로 벌써 감 잡으셨겠지만 저는 한글은 언어학적인 면에서 세계에서 으뜸가는 과학적인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어생활에 있어서 한글전용은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말의 60% 이상이 한자어이기 때문에 한자로 표기되지 않으면 의미 전달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이미 아는 사실이지요. 한글전용을 시행한 이후 우리나라는 각 연령층의 문서 해독능력이 선진국에 비해 갈수록 떨어져 조사 대상국 중 거의 꼴찌 순이라고 합니다. 실질 文盲率이 높다는 거지요. 그에 반해 한자를 混用하는 일본은 부동의 1위라고 합니다. 2016년에는 헌법재판소에서 한글전용은 合憲이라고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이제는 한글전용 반대론자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일을 하다 보니 한글전용의 문제가 다시금 눈에 띄게 됩니다.

 원래 한자는 造語능력이 뛰어납니다. 새로운 개념어가 필요한 경우 쉽게 造語가 가능하고 한자로 표기하면 설명이 필요없이 의미 전달이 됩니다. 또 그렇게 만들어지고 쌓인 전문 용어들이 이미 많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용어들을 한글로만 표기해 놓으니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짐작으로 오해하여 엉뚱한 결과가 생기기도 합니다. 제 분야는 아니지만 의료 분야의 전문용어는 한자로 표시하지 않으면 뭔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기술관련 문서나 법률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곤혹스러웠던 경험도 참 많습니다.

 법률 문서(계약서)의 한영번역과 관련해서 혹시라도 여러분은 이렇게 하지 마시기를 바라면서 제가 경험한 것 한 가지 소개합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글 계약서의 초반 단락 제목에 ‘전문’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영문 계약서의 몇 가지 형식 중에서 ‘Preamble’이라는 단어를 직역한 것 같은데 한글 계약서상 적절한 위치에 쓰고 있지도 않거니와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으니 사실 이게 前文인지 全文인지 경험 없이는 구분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번은 Quality Control 의뢰를 받은 한영 번역문에 ‘전문’의 번역을 ‘Full Text’로 해 놓은 것을 보고 失笑한 적이 있습니다. 한글 원문이 한글로만 되어 있으니 계약서를 번역해 본 경험이 없거나 적은 번역가라면 나름 고심했겠지만 오역한 경우지요. 제가 올려놓은 ‘영문계약서 번역 요령’에 설명해 놓았지만 전후 맥락상, 그리고 영문 계약서의 형식상 보통의 경우 그 자리에는 전문의 의미는 빼고 ‘WITNESSETH’가 들어가야 합니다. 이 ‘전’이라는 글자는 한글로만 쓰여 있을 때 의미 전달이 잘 안되는 참 고약한 글자입니다.

또 한글로 된 간이계약서상의 ‘공제조합’의 앞 두 글자 공제를 ‘Deduction’으로 사고 친 경우를 본 적도 있습니다. 사실 검색하기만 했어도 共濟組合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 한글전용의 폐해에 더하여 번역가의 안일함이 더해졌다고 봐야지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요즘 한국어가 영어에 많이 오염된 이유도 한글전용에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일리가 있어요. 어떤 새로운 개념의 외래어가 있을 때 한자의 造語능력을 활용하면 그에 해당하는 적절한 용어를 새롭게 생성할 수 있고 근세에 많은 한국어 단어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미 한자 해독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상태이니 그냥 音譯해서 쓰게 된다는 겁니다. 거리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무수한 외계 용어 간판들은 언어 公害가 아닐까요? 중국은 외래어를 철저히 한자로 置換하여 씁니다. 저들이 쓰는 글자가 表意문자이니 借音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발음과 뜻을 가능한 한 置換된 단어에 담는 노력은 칭찬할 만합니다.

 한자어는 이미 우리 말에 융화되어 이미 우리말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데 글로벌 시대에 한글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國粹적인 文化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오랜 세월 한글 전용에 익숙해져 다시 漢子倂用으로 회귀하는 것은 期待難望하니 우리 번역가들이 한글 원문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실질 文盲을 겪을 일은 앞으로도 해결되기 힘든 것 같아서 좀 우울해집니다.

초당
초당

초당은 귀촌하여 주로 법률분야 문서를 한영/영한 번역하는 번역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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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