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번역 시장의 구조

앞의 글에서 번역 시장은 인터넷에 존재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인터넷 바깥에는 번역 시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전통적인 번역 시장 거래가 소멸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래에는(아니 현재에도 이미!) 인터넷이 번역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눈을 떠야 합니다. 이제 이번 글에서는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번역 시장의 구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번역 수요자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고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으며 너무도 다양하기에, 그들을 번역가가 직접 찾아다니며 만나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또 local 마켓에 있는 수요자라 하더라도 번역가는 마케팅을 할 시간도 부족하고 성격상(혹은 재능상?) 잘 하지도 못합니다. 뭐 잘하시는 분도 물론 있겠지만 저를 포함해서 그런 것 잘 못하는 번역가가 많은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중개업체가 등장합니다. 영어로 이들을 번역 agency라고 부릅니다. 이런 중개 업체는 수요자와 공급자 사이를 연결해 주고, 거기에 더해 약간의 부가적인 기능도 담당하는 일종의 브로커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브로커인 에이전시가 번역가를 위한 마케팅을 대신해 주는 셈이죠. 저는 그렇게 봅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게 보지 않으면 어떻게 볼 수 있죠? Agency가 일이 있을 때마다 혹은 있을 때만 번역가를 ‘고용’해서 생산(번역)을 하도록 시키고, 그렇게 만들어진 생산물을 에이전시가 외부에 팔고, 그 판매 대금의 일부를 생산에 참여한 번역가에게 나누어 준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같죠? 꼭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 계약직 노동 착취 같잖아요? 만약 번역가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참 인생이 답답해집니다. 생각을 바꾸면 말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뭘 해 나가야 하는지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답답한 시각은 하루 일찍 버리시길 바랍니다. 자, 조금 더 알기 쉽게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번역 시장의 구조

 

 

좀 복잡한 그림 같지만 잠깐만 집중해서 그림을 노려 보시면 실은 간단합니다. 이 그림은 다수의 번역 수요자들과 다수의 번역 공급자(번역가)들이 다수의 에이전시들을 매개로 만나고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 그림은 번역가의 고객이 누구인지를(이중 고객: 실수요자와 에이전시), 그리고 그 고객들이 각각 무엇을 원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그림에서 보면, 실수요자들은 거의 agency들을 통해서만 번역가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최종 수요자 1(제일 위)만 시장에 직접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런 최종 수요자 1은 정부나 구글 정도 되는 엄청 큰 실체이거나 아니면 자기 할머니의 일기장을 번역하고 싶어 하는 개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특수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고, 무엇보다 숫자상으로 드물지요(인터넷 시장에서는).

 

[보충 설명: 물론 인터넷 시장을 아예 우회한 전통적 시장에서는 이런 번역가와 최종 수요자의 직거래가 정상적인 거래 모델입니다. local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시간과 재능과 의욕이 있는 경우, 번역가가 이런 모델을 가지고 추진하는 것은 항상 바람직한 일입니다. 브로커가 빠졌기 때문에 훨씬 높은 번역료를 받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비록 저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번역가가 local 마켓에 접근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번역 시장이 이런 구조로 형성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agency 없이 실수요자와 번역가가 직접 만나면, 실수요자는 훨씬 싸게 번역 서비스를 사고 또 번역가는 훨씬 비싸게 팔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중간에 저렇게 agency를 끼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건 국제화 시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실수요자인 어떤 회사가 앱을 하나 개발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세계 15개 언어로 번역하겠다고 결정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이 회사가 도대체 언제 15개 언어의 번역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내고 그들과 흥정하고 계약하고 하겠습니까? 또 이 엡 개발자는 어떤 번역가가 과연 번역을 잘 하는 사람인지, 납기까지 번역을 완성해 낼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참 막막하겠죠? 그러니까 번역가가 이런 일을 잘 못하듯이 거꾸로 실수요자(이 예에서는 앱 개발 회사)도 이런 일을 잘 못하고, 서투르고, 골치 아프고, 혹은 싫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agency를 찾는 겁니다. 실수요자가 에이전시에 연락해서 자기의 필요를 얘기하면, 짧은 문서인 경우에는 일주일 안에 15개 언어로 척 번역해서 넘겨줍니다. 고민 끝!

 

이런 agency의 파워를 개별 번역자가 따라가긴 힘들겠죠? 그래서 때론 얄밉지만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이런 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번역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자 하는 사람은 일단 이런 agency와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여기서 영어 단어 얘기 잠깐 하겠습니다. 영어에 hire와 employ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용례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말이라는 것은 수학과 달라서 절대적인 것이 없고 애매하게 겹쳐지는 것이 많지만, hire는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관계를 맺는 것이고, employ는 상대적으로 긴 기간에 걸친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고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신문사에서 어떤 칼럼을 맡아서 글을 고정적으로 기고할 사람을 찾는다고 할 때 쓰는 단어가 hire죠. 그리고 변호사에게 어떤 일을 맡기는 것도 변호사를 ‘hire’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변호사를 employ 한다고 하면 좀 이상하죠?

 

반면에 누구를 employ 하고 그래서 그 사람을 employee로 만들게 되면, 고용자는 그 피고용자에게 여러 가지 법적인 의무가 많이 생기죠. 여러 가지 benefit도 줘야 하고, 많은 경우에 그 employee가 한 행동에 대해 고용자로서 법적인 책임도 져야 합니다. 제가 왜 갑자기 이렇게 hire와 employ의 차이를 설명했냐 하면, 번역가는 agency의 employee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Agency와 계약을 하려고 하면 계약서에 흔히 보는 문구가 “당신은 우리 회사의 employee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싫든 좋든, 번역가는 에이전시에게 통상적인 의미의 employee는 절대 아닙니다. 반면에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PM(Project Manager)은 그 에이전시의 종업원이죠. 번역가는 어디까지나 특정 프로젝트를 위해 hire 되는 것이고, 그 프로젝트가 끝나는 순간 서로에게 아무런 권리도 의무도 없습니다. 변호사에게 사건을 의뢰하고 그 사건이 끝나서 수임료를 지불하고 나면, 변호사와 고객은 서로에 대해 권리와 의무가 없듯이 말입니다. 이것은 agency로서는 번역가에게 다음 번에 일을 또 맡겨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고, 번역가로서는 앞으로도 이 agency의 일을 다시 수락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죠. 또 번역가 측에서는 원하면 가격을 올릴 수 있고 그것을 agency가 수용하지 않으면 관계를 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agency와 번역가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면서도 언제든지 서로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대다 시장의 특징이고요. 여기서 번역가의 실력과 명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습니다.

 

ProZ에만 약 4,500개의 agency가 등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좋은 번역가를 찾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좋은 번역가와 인연을 맺지 않고서는 사실 이들은 장래가 없죠. 그들도 다른 agency들과 경쟁해야 하니까요. (위의 그림을 다시 한 번 보시면 느낌이 오실 겁니다.)

 

스스로는 번역을 하지도 않고 할 능력도 없는 agency들이 최종 수요자들에게 마케팅을 할 때 그들의 메시지가 뭐겠습니까? “우리 agency는 정말 좋은 번역가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 회사에 일을 맡겨달라.”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agency들이 그 외에도 조금 추가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핵심이죠. 그래서 그들은 늘 좋은 번역가를 찾고 있습니다. 괜찮은 agency들은 아예 그것만 하는 직원을 두고, 항상 온라인에 있는 프로필들을 뒤져서 연락을 하고, 테스트를 하고, 등록을 하게 하고, 계약을 맺으려고 하죠(일종의 head hunting).

 

이제 인터넷 시대가 번역가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시나요?

Bryan
Bryan

브라이언은 의료분야에서 한영번역을 하는 번역가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내와 둘이 삽니다. 여행과 독서와 음악과 커피를 좋아합니다.

4 Comments

  1. […]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답답한 시각은 하루 빨리 버리시길 바랍니다. – 인터넷 번역 시장 구조", "번역가는 인터넷 시대의 번역 시장 구조 때문에 독특한 상황에 처해 […]

  2. […]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답답한 시각은 하루 빨리 버리시길 바랍니다. – 인터넷 번역 시장 구조", "괜한 데 돈 쓰지 마시고 그 시간에 번역 실력을 다듬고 또 실제로 일을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행복한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