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스러운 성격 탓에 규칙을 좋아하는 저는 감정과 공감 2에서 외래어 표기법을 비판하는 글을 읽고 가슴이 뜨끔(!)해 버렸습니다. 올바른 외래어 표기법을 알리고자 이 카테고리를 만들었는데 첫 글부터 난관에 봉착해 버렸네요. 루크 님의 제안대로 규칙에 얽매이지 말고 사고의 유연함을 발휘해 사용자의 편리함이라는 관점으로 외래어 표기법을 조명해 보겠습니다. (아니, 사실은 표기법이 깐깐하고 꽉 막힌 벽창호가 아니라는 항변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감정과 공감 2에서 제시한 문제를 다시 꺼내 보겠습니다. 현실을 반영 못 하는 철 지난 관습에 매이지 말고 매일 진화하는 언어의 흐름에 맞춰 번역하고 통역하라는 조언에는 적극 찬성입니다. 제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외래어 표기법의 이해와 활용 측면입니다. Tom을 톰으로 써야 할까요, 탐으로 써야 할까요? 다시 말하면 표기법을 따를까요, 발음을 따를까요?

한번은 미국 드라마 감수를 진행하면서 의심스러운 이름 표기를 발견했습니다. Kuo Wenling이라는 중국인을 쿠오 웬링으로, Vlasik이라는 미국인을 블라시크로 표기해 놓았죠. 번역가에게 물어보니 영상에서 들리는 발음대로 표기했다고 합니다. 중국어 번역가라면 그리고 미국식 영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두 표기가 얼마나 어색한지 바로 눈치챘을 것입니다.

Vlasik이라는 소리가 어떻게 들리나요? 물어보면 블라시크, 블래시크, 블래식, 브라식, 블러슥 아주 다양한 답변이 나올 수 있습니다. 특히 해당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기상천외한 답변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들리는 발음대로 썼다는 함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귀로 인지한 음성∙소리는 기호화를 거쳐 문자로 표기되는데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기호화 관습이 작용합니다. 즉 특정 언어를 표기화하는 과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글자로 써 낼 수 있는 것이죠. 해당 언어의 정확한 발음, 표기 습관을 모르면 ‘들리는 대로’는 수십 가지 표기를 만들어 낼 기세입니다.

번역본을 보고 읽는 사용자 입장에서 외래어를 어떻게 표기할까 생각해 보면 현재 번역 시장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씁니다. 1) 국립국어원이 정한 표기법대로 2) 널리 쓰이는 관용 표현대로 쓰는 것이죠. 그 외 원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 더 나은 경우, 관용 표현이 없어 발음대로 쓰는 법이 있겠고요. 그런데 어떤 방법을 선택할지가 쉽지 않습니다.

외래어 표기법 에스더의 온라인으로 영상 번역 배우기  외래어 표기법 이해와 활용

(홀로 노는 표기법) 데크의 규정 표기는 이고, 포춘 쿠키의 규정 표기는 포천 쿠키입니다. ‘덱으로 가자’, ‘포천 쿠키 줘’ … 네, 여러분이 봐도 어색해서 견딜 수 없죠.

(관용 표현의 혼란) 널리 쓰이는 관용 표현이 사용자 입장을 가장 잘 고려한 것임이 분명하지만 유명하고 단일화된 이름이 아니라면 2~3가지 이름이 남발되기 일쑤고 유명하지 않은 이름은 관용 표현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벤져스처럼 유명한 (팬덤) 작품 캐릭터는 무조건(!) 관용 표현을 써 주어야 하는데 (안 그러면 뭇매…) 팬심 1도 없는 저는 M.O.D.O.K. 이름을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모도크, 모독을 마구 섞어 쓰는데 (심지어 한 사람이 쓴 포스트에서조차…) 이거 TV에 나가면 내가 쓴 이름이 정식 명칭으로 굳어 버리는 건가? 아하~! 그럼 내가 이름을 하나로 정해 주겠어, 캬캬캬!!!

터미네이터가 처음 나왔을 때는 우리의 주지사께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라더니 요즘은 슈왈제네거, 슈워제네거라고 합니다. 대체 님의 정체는 무엇…

 

역시나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는 번역가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을 고수하기보다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선택해야겠죠.

표기의 기준과 일관성을 세운다는 점에서 외래어 표기법은 훌륭한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외래어 표기법의 대원칙은 현지 발음대로 표기 + 관용적으로 널리 쓰여 왔던 단어 인정입니다. 외래어 표기법이 발음대로라고? 진짜? 못 믿겠는데?? 네, 못 믿을 만한 예가 많겠지만 ‘발음대로’ 맞습니다. 사실 관용 표현이 발음과 동떨어진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악센트accent의 원 발음은 액센트, 라디오radio는 레이디오, 카메라camera는 캐머라, 바나나banana는 버내나, 마켓market은 마킷이죠. 레이디오 틀어 봐’라고 하면 ‘저건 뭔 병맛’이라는 눈초리 세례…

발음대로 표기한다는 원칙에 따라 Tom은 톰, 탐 모두 올바른 표기입니다. 왜냐하면 발음이 두 가지니까요. 결국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의 차이인데 국립국어원이 주로 영국 발음을 주요 용례로 올려 톰이 관용화된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발음대로 쓴다는 원칙에도 기준이 필요합니다. 발음 기호와 한글 자모를 1 대 1로 대응하는 방법이 가장 기초겠지만 이것도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취급해야 하는 외래어는 영어뿐만이 아니죠. 수십 가지 언어를 한글 자모로 표기해야 하는데 언어 특성이 제각각이고 한글로 표기가 불가능하거나 까다로운 소리도 있어 이를 다 수용하며 일관된 규칙을 세우기란 불가능합니다. 발음과 표기의 일관성을 타협한 결과물 중 하나가 된소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래서 Paris를 빠리가 아닌 파리로, ふくおか를 후꾸오까가 아닌 후쿠오카로 쓰게 되었습니다. ‘발음대로는 아닌 것 같은데?’라는 이견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발음에 가깝게 표기를 선정하는 과정이 얼마나 타당했는지 궁금하다면 국립국어원에 질문하시는 걸로…)

표준 표기법 제정과 별도로 관용 표현을 어느 정도까지 표준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부분은 사전 등재어처럼 하나하나 심의해서 용례에 올리고 있는데 모든 관용 표현을 다 표준으로 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포천 쿠키’를 먹어야 합니다.

 

외래어 표기법이 얼마나 유용한지 이제 공감하시나요?

그럼 본격적으로 여러분을 외래어 표기법의 세계로 안내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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