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기소침해진 번역가들에게

저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실은 전부)은 저의 직업을 부러워합니다. 뭐 저의 일에 대해 남들이 정말 관심이 많거나 제가 어떻게 일하는지 속속들이 알아서 그렇게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고, 아마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저도 남들에게 굳이 자랑은 하지 않더라도 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상당히 만족하고 또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지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번역가의 삶이 늘 활기차고 의욕에 넘치고 혹은 음악에 둘러싸여 일하는 평온 그 자체인 것은 분명 아닙니다. 다른 여느 직업과 마찬가지로 번역가도 일과 관련된 스트레스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스트레스 때문에 낙심하고 침울해지는 순간도 있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 선택이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큰 스트레스나 낙심을 경험한 것은 아니고 또 삶에서 낙심과 스트레스는 어디에나 있는 불가피한 것이라 생각하기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그런 경험을 할까봐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도 내 삶의 한 부분이고, 잘 소화하면 약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그런 시간, 그런 경험을 할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은지 모든 번역가들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순간, 그런 날, 그런 시기를 어떻게 넘길 수 있을지에 대해 제 생각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사실 저도 항상 활기차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가끔 심사가 뒤틀리면 며칠씩 입을 다물고 지내기도 하고, 훌쩍 하루 종일 잠수를 타기도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아주 오래가도록 내버려두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울과 낙심도 일종의 습관이어서 지속되면 나중에는 내가 왜 화가 났는지 혹은 왜 침울해졌는지 기억도 안나면서 괜히 기분만 나쁘게 지낼 수도 있으니까요.

 

번역가의 의기소침은 어느 정도는 우리들의 장점, 우리들을 번역가가 되게 해 준 우리의 성격이나 특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왜냐하면 번역을 하거나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는 것 같거든요. 뭐 완벽주의까지는 아니라도 번역가들은 뭐든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하는 사람들이고 또 지적이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 생각에는 완벽주의와 방금 설명한 특징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완벽주의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번역을 하거나 글을 썼는데 나쁜 평가를 받거나 혹은 아무 평가도 받지 못하거나 혹은 고객으로부터 나쁜 피드백을 받으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상처를 받고 침울해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을 쓰는 일이나 번역을 하는 일에 정답이란 것이 없고 백점이란 것이 없는 줄 알지만, 막상 무슨 이유로든 나쁜 피드백을 받으면 상당히 오랫동안 화가 나고, 자신이 그 동안 잘 해온 것과 그 동안 축적된 많은 긍정적인 피드백은 잊어버리고 그 한번의 나쁜 피드백에 마음이 온통 무너져 버리죠. 남들이야 뭐 그런 것 가지고 끙끙대냐고, 그냥 신경 꺼버리라고 쉽게 말할지 몰라도 막상 본인은 그게 그리 쉽게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다음과 같은 해독제(?)를 준비해 두었다가 사용해 보십시오.

 

 

나만의 비밀 해독제 준비

제가 무슨 마법사의 묘약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요, 그저 제 자신이 누구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이나 글, 사진, 카드 등을 말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폴더 하나에 모아 두었습니다. 심지어 아내도 모르는(정말 모르는지는 확실치 않음…) 장소에 몰래 보관해 두었다가 가끔 꺼내 봅니다. 꼭 침울한 때만 꺼내 보는 것은 아니고 제 생일, 연말 등에도 꺼내 봅니다. 짜잔~

 

 읽고 싶은 것들

 

이 폴더에는 거의 십년 이상 동안 제가 모아 온 여러가지 잡동사니가 들어 있습니다. 제가 쓴 것들도 더러 있지만, 정말 힘이 되는 것은 남이 써 준 글입니다. 프라이버시니까 다 공개는 못하지만 번역과 관련된 것 하나만 공개하자면, 제 아들이 어릴 때 제 생일카드라면서 손으로 깨알같이 써 준 것이 있습니다.

 

 2015-11-22 22.11.18

 

위의 그림에는 제 아들이 저를 묘사하는 이백여 개의 단어들이 가로 세로로 얽혀 있는데, 그 중에 World-renowned translator라고 써 둔 것이 보이시죠? 제가 아무리 얼굴이 두꺼워도 제가 제 입으로 저런 말을 했을 리는 없고, 아마 제가 없을 때 아내가 아이에게 한 말을 기억하고 저렇게 써 놓은 것 같습니다. 물론 사실과 매우 다르지만 그래도 저 말이 제게는 한없는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적어도 제 아들이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고 있으니까요. 가끔 무슨 이유로든 기분이 나쁘고 의기소침해 진 날, 저런 글귀를 포함해서 지난 10여 년간 모아둔 강력한 해독제 덕분에 저는 그리 오래지 않아 그런 무드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것을 하나 만들어 보십시오. 폴더 제목은 저처럼 유치하게 짓지 마시고(왜 저 모양인지…) 멋있는 것으로 하나 짓고, 거기에 여러분께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들을 모아보십시오. 생일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을 적어 주었다면 그건 즉시 그 폴더에 넣어버리는 겁니다. 또 고객이 나의 번역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해 주었다면 그것도 텍스트만 프린트하거나 아예 스크린샷을 찍어 프린트를 한 후 그 폴더에 넣어 두세요. 그리고 (몰래…) 꺼내 보세요. 힘이 날 겁니다!

 

 

누군가와 대화

위에 쓴 비밀 해독제보다 더 강력한 것은 사실은 제 아내와의 대화입니다. 이런 곳에 이런 말 쓰는 것이 정말 어색해서 짧게 쓰겠습니다. 암튼, 누군가에게 자신의 문제, 상황, 분노, 좌절에 대해 말을 하다 보면 어느 새 그런 것이 조금은 상대화되고 삶의 더 큰 문제들, 더 심각한 상황들, 장기적인 이슈들에 비하면 제가 방금 경험한 것은 별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강아지도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깐 일에서 떠나는 것

만약 벌어진 일이나 상황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서 뭔가 해결할 방도가 있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으면 해결을 하고, 사과할 것이 있으면 사과를 하고, 내 쪽에서 보상할 것이 있으면 보상을 해야죠. 그러면 한결 낫겠죠. 그러나 그렇게 했는데도, 혹은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의기소침해 질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답은, 잠깐 일에서 떠나는 겁니다.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을 맘 속에 넣어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우리의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 생각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대신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뭔가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생긴 것과는 달리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고 노래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자연 속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겨울 제외) 늘 하고 싶어하는 일입니다. 영화도 좋아하고, 아내를 옆에 태우고 온타리오의 끝 모를 시골길로 쌩~ 드라이브를 가는 것도 좋아합니다. 아이스크림 사먹으러 가는 것도 좋아하고. 오늘 사생활이 아주 꾸러미째… 암튼, 여러분도 고상한 일이 아니라 정말 즐거워하는 일을 해 보세요. 정말 한결 나아지고 툴툴 털어지고 어느 새 깔깔거리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Laughing dog

 

마지막으로, 방법으로 포함시키긴 좀 뭣한 항목입니다만, 감정적으로 회복된 후에는 다시 우리의 생각 모드로 돌아와서 잠깐 분석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상황이 정말 나의 실수나 부족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그냥 고객이 그날 다른 일로 기분이 나빠 괜히 나에게 분풀이를 한 것인지, 또 이것이 어쩌다 한번 발생한 일인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일인지를 분석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에 따라 후속적인 행동을 취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드는 지혜겠지요. 만약 내가 프루프리딩을 소홀히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고 판단이 되면, 작업 프로세스를 손을 보아야 합니다. 만약 내 편에 잘못이 없는데 지속적으로 나를 기분나쁘게 하는 어떤 고객이 있다면, 그 고객과의 비즈니스를 중단해야 합니다. 또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일과 관련되어 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면(그건 이상한 일입니다), 나의 프리랜서 비즈니스를 큰 틀에서 분석해 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찾아내어 해결을 해야 합니다. 내가 수준이 낮은 고객들을 주로 상대하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되고 시간 낭비가 일어난다든가, 내가 너무 낮은 번역료를 받고 일을 하고 있다든가, 내가 시간 활용을 잘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든가, 나의 소스 언어에 대한 이해나 타겟 언어 작문 실력이 근본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런 것도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감정적인 요동이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현실의 결과라면, 그저 나의 감정에만 대처하려고 하지 말고 그런 그 현실 자체를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Bryan
Bryan

브라이언은 의료분야에서 한영번역을 하는 번역가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내와 둘이 삽니다. 여행과 독서와 음악과 커피를 좋아합니다.

7 Comments

  1. 어디 기고하셔야 할 것 같은 글인데 이런 글을 거저 읽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 저도 선생님 조언을 따라 저만의 해독제를 만들어 놓아야겠습니다. 좋은 생각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2. 마음이 따뜻해지는 수필입니다.

    자녀분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네요…

  3. 행복한 번역가의 삶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좋을 글입니다. 더욱 행복하세요~~

  4. 아직 제대로된 번역가는 아니지만, 상당히 의기소침해져 있었는데요.
    좋은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5. 그렇지 않아도 업무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힘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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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