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번역: 내가 특화시키고 싶은 번역 분야 정하기

어느날, 내게 익숙하지 않은 문서를 번역해 달라는 의뢰가 왔습니다. 마침 다른 프로젝트도 없어서 타이밍은 참 좋은데 문서를 열어보니 내가 익숙하지 않은 분야입니다. 시간을 많이 들이면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이걸 한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거절해야 하나 고민이 될 수 있겠죠? 또 거절한다면 뭐라고 하면서 거절을 해야 하나 하는 것도 고민이 될 수 있구요.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늘 쉽지 않죠. 특별히 번역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번역을 못하겠다고 하는것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일부 PM들은 생각 없이 이런 표현을 씁니다. “Can you translate ~?” 이건 이번 프로젝트를 맡을 시간이나 용의가 있는지 묻는다기보다는 능력을 묻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러면 자존심 강한 번역가는 “아니, 내가 못할 게 뭐야?”하면서 덥석 하겠다고 하기 쉽습니다(어떤 번역가의 과거의 모습…). 또 이런 상황에서 번역가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다른 요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번역가의 일의 특성상 일이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깐 일이 없는 상태에서 꽤 큰 프로젝트 의뢰가 왔는데(큰 프로젝트는 대개 투입한 시간 대비 수입이 큰 경우가 많죠), 그것이 익숙하지 않는 분야라면 여기서 번역가의 판단이 또 흐려질 수 있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하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번역가는 인간입니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지식이 많아도 모든 분야에 다 익숙할 수는 없는 일이죠. 또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해 봤자 재미도 없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한 마디로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닌 경우, 그리고 장기적으로 내가 특화하려고 하는 분야가 아닌 경우, 내 전문 분야가 아니어서 완료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경우, “No, I can’t.”라는 짧고 명료한 말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간단한 말을 못 해서 잘 하기 힘든 프로젝트를 맡아서 며칠을 낑낑대다가 결국 자신의 표준 혹은 업계의 표준에 못 미치는 번역을 하고 나면, 시간은 시간대로 많이 들고 자존심은 자존심대로 상하고, 장기적으로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No, I can’t.”라고 말하는 것이 여러모로 낫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상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긴 한데 그래도 해 보고 싶은 분야, 혹은 장기적으로 그 분야에 특화해 보고 싶은 분야의 경우는 좀 얘기가 다르죠.

 

 

사실 번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 자신 있는 분야가 뭐 그리 있겠습니까? 다 어렵죠. 그러므로 자신이 정말 편안한 분야만 고집하기보다는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차원에서 새로운 분야로 발을 내딛는 것도 필요하죠. 이럴 때는 다음 몇 가지 사항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익숙하지 않은 분야를 처음 할 경우에는 큰 프로젝트가 아닌 작은 프로젝트(예컨대 1,000단어 미만)로 시작하십시오.
  • 익숙하지 않은 분야의 오퍼가 제시된 경우, 반드시 파일을 먼저 보자고 해서 실제로 살펴본 후에 최종적인 결정을 하십시오. (새로운 분야라고 모든 것이 새로울 리는 없잖아요? 어느 정도 새로운 것이지.) 실제 파일을 보시고 어느 정도의 리서치를 하면 해낼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 때 ‘Yes’를 하는 겁니다.
  • 일단 하기로 결정을 하셨다면 평소보다 그 프로젝트에 시간을 훨씬 더 많이 들이셔야 합니다. 익숙한 분야의 비슷한 크기의 프로젝트보다 약 세 배 정도는 할당을 해 놓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기에 데드라인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는 PM과 협의를 하시면 어느 정도 데드라인을 늦출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PM의 입장에서는 평소에 정성을 들이는 번역가에게 새로운 분야의 작업을 맡기는 것이 무성의한 번역가나 모르는 번역가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한 일이기 때문에, PM은 자기 나름대로 노력을 하거나 양보를 하거나 해서 데드라인을 연장해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실제로 작업을 할 때는 인터넷상의 어느 정도 권위 있는 사이트들을 많이 참조해 가면서 작업을 해야 합니다. 번역가 본인이 이해를 못한 문장은 아무리 번역해 놓아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이것이 번역을 할 때 제 신념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배경 지식을 쌓아서 일단 번역가가 먼저 내용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 그 다음에 언어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죠.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를 뒤지면 여러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이 상당히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남에게 묻기보다는 자신이 그런 사이트를 방문하여 읽고 공부하여 이해하고, 그 분야의 표준적인 용어도 메모해 두고, 또 그런 사이트 자체도 따로 즐겨찾기에 걸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어떤 새로운 분야의 프로젝트를 몇 번 하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자신이 생기고, 그 분야가 편안해 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 그 분야에 특화할 것인가 하는 것은 또 한 번의 결정이 필요하죠. 그것은 자신이 그 분야에 호기심이 강하고 그 분야의 프로젝트를 할 때 흥미와 재미를 느끼는지, 그리고 그 분야가 상대적으로 높은 번역료를 보장하는 분야인지 등을 고려하여 결정할 문제일 것입니다.

 

나중에 덧붙임:

제가 전문번역에 대한 e-course를 만들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코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번역 전문화는 번역가의 커리어 전략의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Bryan
Bryan

브라이언은 의료분야에서 한영번역을 하는 번역가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내와 둘이 삽니다. 여행과 독서와 음악과 커피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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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