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 tool 시장에 대한 이해(4): Trados 유저만 비딩하라는 에이전시?!

이번 글에서는 CAT tool 시장에 대한 이해의 마지막 편으로, 자기네가 선택한 CAT tool을 강요하는 에이전시들에 대처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의 세 글을 이미 읽으신 분들은, 자기 자신만의 CAT tool을 사용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미 이해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이전시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것을 사용하도록 은근히 압력을 가하죠. 자세한 사정이야 제가 알 길이 없지만 제 짐작에는 아무래도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들의 강력한 마케팅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CAT tool 회사들이 아예 에이전시용 버전을 개발해서(제 생각에는 아마 무료로) 배포한 후 그것을 쓰도록 강력한 푸시를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메모 큐(MemoQ: 이것은 헝가리 회사에서 만든 강력한 트라도스 대항마인데, 시장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아요. 다만 한글을 도무지 이해를 못해서리… 엑스포트 했을 때 한글 글자 간격을 계속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 결국 그만 쓰고 말았죠. 수작업으로 그것 잡아 주는 것만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요.) 같은 경우는, 프로젝트 배정에서부터 최종 고객에게의 전달까지를 그 자체에서 다 처리할 수 있는 버전을 개발했더군요. 이런 소프트웨어는 PM이 하는 많은 일들을 자동화시켜 주어서 에이전시의 내적 효율성을 올려 줄 수 있는 도구니까 번역가들이 순응만 해 준다면 에이전시로서는 확실히 이점이 있지요. (앞의 수식에서(D)를 줄일 수 있는 방편.)

 

제가 아는 회사도 한동안 제게 계속 푸시를 해왔는데, 저도 원래 메모큐를 썼던 터라 “어차피 아는 소프트웨어인데 뭐…”하는 심정으로 한동안 수용했었다가, 어느 시점에서 단호하게(?) 거절했더니, 이제는 이것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 고용된 PM은 그런 사정을 모르고 제게 느닷없이 메모큐 패키지를 턱 보내오는 때도 있어요. 그럼 또 얘기해야죠. 이런 것 보내면 나 일 안한다고. 그러면 “아, 몰랐다…”면서 소스파일만 보냅니다.

 

여하튼,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첫 번째 요소는 자신감입니다. 그 에이전시와 거래를 하지 않더라도 나는 내 방식대로 일을 해나가겠다는 자신감과 단호함이 필요하죠.

 

또 다른 어려움으로는 job notification에서 아예 트라도스 사용자만 비딩에 응하라는 식의 문구입니다. 저는 사실 요즈음은 비딩에 크게 의존하지 않지만 그래도 매우 좋은 에이전시가 장터에 나온다면,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려고 나름 꾸준히 노력합니다. 별 볼일 없는 에이전시가 그런 문구를 사용하는 것이야 어차피 별 신경 쓸 일이 아니지만, 좋은 에이전시들도 가끔 트라도스가 있는 사람만 비딩하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런 경우에 저는 이렇게 합니다. 일단 비딩을 하면서, “난 트라도스는 안 쓰지만 트라도스와 compatible 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고 말해 줍니다. 이 말은 좀 애매한 말이긴 합니다. 사실 tmx 파일을 교환할 수 있게 되었는데 트라도스와 compatible 하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뭐가 있겠습니까? (온라인 플랫폼이야 어차피 형태가 다른 것이니까 그런 것을 제외하면요.) 그리고 어차피 트라도스 특유의 기능은 그 어떤 소프트웨어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고요. 예를 들어 unclean file을 받아서 track-change를 남기는 것과 같은 매우 특정한 작업은 트라도스를 가진 번역가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매우 특정한 방식으로 일을 진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라는 강력한 소프트웨어가 기본적으로 있는데, 굳이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트라도스를 더 팔기 위한 것 외에는). 더 나아가, xliff 파일, sdlxliff 파일 등은 웬만한 CAT tool들은 다 읽어 들일 수 있습니다. 트라도스가 선점한 시장에 후발 주자로 진출하기 위한 후발 회사들의 전략이겠죠. 이런 논리로 접근하고 설득하면 상당한 경우에 수용합니다. 결국 번역은 소프트웨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가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설득이 안되면 물론 하는 수 없죠. 좋은 에이전시와 끈을 맺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요.

 

결국 어떤 소프트웨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트라도스를 구입하실 형편이 되시고 번역하다가 사전이나 구글 서치같은 것을 화면을 빠져 나가서 따로 하실 생각이시라면, 트라도스를 구입하시는 것도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번역가가 자신만의 소프트웨어를 쓰고 에이전시들이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쓰는 다양한 번역가들을 수용하는 형태로 시장이 재편되어 가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일이야 이 블로그의 범위를 벗어나는 논의이고, 개별 번역가가 그리 대단한 힘을 미칠 수도 없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번역가가 자신만의 소프트웨어(온라인 플랫폼이 아닌 것, 에이전시가 소유한 것이 아닌 것)를 가지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Bryan
Bryan

브라이언은 의료분야에서 한영번역을 하는 번역가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내와 둘이 삽니다. 여행과 독서와 음악과 커피를 좋아합니다.

One comment

  1. 브라이언 선생님의 번역 철학이 담긴 글 정말 고맙습니다.

    번역가 새내기에게는 아주 훌륭한 스승님이십니다.

    부디 늘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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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