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번역가로 정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궁금해할 것 같아서 이렇게 제목을 정해 놓고는 벌써 후회하고 있습니다.

 

질문 자체가 “시험 잘 보려면 몇 시간이나 공부해야 됩니까?”하고 묻는 학생의 물음과 비슷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무슨 정답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막연하더라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 좋을 것 같아서 용감하게 글을 시작해 봅니다.

 

우선 사람들의 증언(Proz는 번역가들의 토론장이고 놀이터라서 많은 조언과 고백들이 있습니다)을 들어 보면 3년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대답을 들으면 번역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실망이 될 것 같습니다. “헉, 그럼 3년 동안은 이슬만 먹고살아야 하는 거야?”

 

 

 

참 답답하죠. 하지만 무엇인들 시작하자마자 마구 일이 잘 되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무슨 비즈니스를 시작해도 처음에는 다 어렵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프리랜서 번역가는 다른 비즈니스보다 자리를 잡는데 더 오래 걸립니다. 전에도 제가 어딘가에서 썼지만, 여러분 주위에서 번역이 필요한 사람 어디 보셨어요? 전 사실 살면서 거의 못 봤어요. 실토하자면, 최종 고객이 없는 저로서는 한 번도 그런 사람 만나본 적이 없어요. 무료 봉사로 번역이나 통역을 해 준 적은 많지만. 그러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으냐 하면, 돈을 빨리 벌고 싶은 사람은 번역을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잠깐, 이 말은 번역가가 돈을 못 버는 가난한 직업이라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제 블로그 앞 부분에서 강조했듯이 번역가는 떼돈을 못 벌어도 수입이 상당히 괜찮은 직업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밥 먹으니까 식당을 차리면(그리고 운영을 잘 하면) 꽤 돈을 빨리 벌겠죠? 사람들은 누구나 옷을 입고 사니까 옷 가게를 차리면(그리고 운영을 잘 하면) 돈을 꽤 빨리 벌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어지간해서는 번역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번역을 해서는 돈을 빨리 못 버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프리랜서로 번역을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은 숫자적으로 워낙 드물고, 또 번역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나 조직도 비록 우리 동네에는 없지만 전 세계에 걸쳐서는 상당히 많이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봐서는 번역은 해 볼 만한 일입니다. 다만, 시간이 걸리는 것이죠. 번역 프로젝트를 하나하나 착실하게 해서 그것으로 고정 고객을 하나둘 늘여가고 명성을 쌓아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걸리죠. 그것도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니까. 제 경험을 기초로 해서 앞에서 말한 3년이라는 기간을 조금 분석해 보겠습니다. (저도 이 3년이라는 숫자에 대해 크게 봐서 동감합니다. 물론 정확한 숫자는 아니고 사람마다 상황이 다 다르고 또 투자하는 노력과 시간이 다르니 숫자 자체가 큰 의미는 없겠지만요.)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애매한 표현인데, 두 가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 1 단계: 번역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번역만 해도 생계를 유지할 정도가 될 때까지의 시기
  • 2 단계: 전문화, 고객 업그레이드(여러 가지 이유로 맘에 안 드는 고객을 버리고 보다 나은 고객으로 물갈이를 하는 것) 등을 통해 번역 비즈니스를 발전시키고 즐기는 단계

 

뭐 이 두 단계가 두부 자르듯 명확히 갈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둘은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고, 그래서 자리 잡기의 두 단계가 아닐까 합니다.

 

번역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1 단계만 마칠 수 있어도 너무 좋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이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도 본인의 언어짝(language pair), 번역을 시작하기 전의 본인의 기본 실력과 번역을 시작한 후에 본인이 투자하는 노력과 시간에 따라(파트타임으로 하느냐 풀타임으로 하느냐 등)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제 경험을 토대로 대충 말씀드리면 한 일 년 반에서 이년 정도 걸리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 정도 되니까 다른 수입이 필요 없이 번역만으로도 먹고 살겠더라구요.

 

논리적으로 보면, 1 단계를 졸업하고 나면 바로 2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즉, 번역만 해도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수입이 늘어나면, 그 때부터 당연히 번역 비즈니스를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그냥 그런 단계에 계속 머물 수도 있겠죠? 아니면 그냥 일만 계속 늘여갈 수도 있겠죠? 그건 물론 번역 비즈니스에서 장기적 전략이 없어서 그런 거죠. 하지만 똑똑한 번역가는 2 단계로 넘어갈 것입니다. 2 단계의 끝은 없겠지만 어느 정도 본인이 만족하는 상태가 되려면 또 한 1년 내지 1년 반이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2 단계를 거치는 것은 좀 쉽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다른 일 하느라고 시간을 쓰지 않고 오직 번역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일을 늘리고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좀 더 쉽지요. 적어도 처음 시작해서 1 단계를 통과하는 것보다는 꽤 쉬운 것 같습니다. 2 단계에서는 번역 기술도 중요하지만 비즈니스로서의 측면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 생각에는 일단 2 단계까지 왔다면 번역가의 일과 삶은 사실 참 좋습니다. 물론 바쁘다면 나름 바쁜 삶이지만 욕심내지 않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과 삶의 틀을 다시 짜나 가면 실은 지구 상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보다 여유 있고 윤택한 삶일 것입니다. 물론 처음 선택할 때 이 길이 정말 본인이 좋아하고 맞는 길이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과 삶(번역가에게 이 둘은 사실 너무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번역가가 된다는 것은 삶의 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거든요)의 틀을 잘 잡아서 장기적으로 계속 실력이 나아지고 명성이 올라가는 쪽으로 비즈니스를 운영해 나가야 하는 그런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은 2 단계를 바라보기 전에 일단 어떻게 1 단계를 졸업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파트타임으로 다른 일을 하면서 풀타임 번역가가 되는 방향으로 애를 써 본다든지, 저축해 놓은 돈으로 1년 반을 버틴다든가… 에구,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 같네요. 하여튼 독일 속담에 있듯이, 모든 시작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방향이 자기에게 맞는 방향이라고 확신하는 분들께서는 용기를 내 보세요. 비록 다른 사업보다 자리 잡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러다 보니 중간에 포기하기도 쉬운 길이지만, 시간을 내 편으로 삼아서 작은 진보라도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또 다른 작은 진보를 이루는 방향으로 착실하게 걷다 보면 어느새 1 단계를 졸업하는 날이 올 겁니다. 그것만 해도 정말 행복할 겁니다. 아니 그 이전에라도 행복할 것입니다. 계속 파트 타임으로 번역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니까요. 그렇게 선택하신 분들은 이미 1단계를 졸업하신 분들이라고 해야겠죠.

 

 

아무쪼록 새로 시작하시는 분들, 파이팅!!!

Bryan
Bryan

브라이언은 의료분야에서 한영번역을 하는 번역가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내와 둘이 삽니다. 여행과 독서와 음악과 커피를 좋아합니다.

10 Comments

  1. 안녕하십니까? 다름 아니라, 이 사이트에 있는 내용을 인용할 허락을 받기 위해서 메시지를 적습니다.

    제가 현재 수강하고 있는 진로 관련 강의에서, 자신이 원하는 진로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고, 그 내용을 발표하는 과제를 받았습니다. 이 과제에 이 사이트의 내용을 사용하여도 괜찮을까요? 출처는 반드시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면 프리랜스 번역과 진로에 대한 인터뷰를 메일로 나마 할 수 있을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 안녕하세요.
    여기가 맞는 자리인지 모르겠지만
    기술 번역 문의 드리고자 연락드립니다..

    그 외에, 혹시 한국 기술 번역자 플랫폼이 인터넷에 있나요?

    모든 정보에 미리 크게 감사드립니다.

    장하준

    • 그런 것이 따로 있지는 않고요, ProZ나 TranslatorsCafe같은 곳에서 다른 종류의 번역과 함께 취급됩니다.

  3. 좋은 정보 정말 감사합니다 ^^ 뉴스레터 구독하기 위해 댓글 남겨요

  4. 전부터도 주욱 지켜봐왔는데, 이번엔 업댓이 좀 기셨군요.
    사실, 업계에서는 사람 확 빡치게 하는이들도 많지요.-_- [먹튀라던가. 갑이라던가.]
    저도 관련업계에서 몇번 디었습니다. 처음엔 몰라서 쓸데없이 투자한 돈만해도 몇십에서 몇백입니다.
    거기다 번역샘플 먹튀에서 사기까지.( 그걸로 뭘했는진 사실 잘 모릅니다.)

    좋은정보들 잘 지켜보고 있습니다.

    근래 약 4년간 번역계에 입문하면서 (잠깐 입문기가 있긴했었습니다만.) 벼라별 진상부터 심지어는 병적인꼴들을 다 보고 겪는군요.

    그런꼴들 보고 겪기보다 돈독한 모습들이 더 보기 좋을텐데 그건 어렵나 봅니다.
    (게중에는 실지로 직접 형사처벌까지 고려중인 자도 있으니까요. 실지.)

    여러가지 팁들이나 하시는 말씀들 심도있게 보고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들 많이 볼수있다면 좋겠네요.

  5. 유용한 포스트 감사합니다.
    번역가로써 발을 들인 첫 해 운좋게 큰 회사에 입사해 초짜로써 누구보다도 바쁜 번역활동을 하다가, 2018년은 거의 번역을 하지 않았었고 올해들어 다시 야금야금 일감이 들어오고 많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혹시 개인적인 조언을 하나 구하고 싶은데 메일을 보내도 괜찮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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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