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 보면 무서워질 때가 많습니다.
이빨 꽉 악물고 누군가와 싸워야 할 것 같고,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눈코 뜰 새 없이 무언가를 향해 질주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사방에 깔려 있습니다. 나만 안 그러면 코 베어갈 것 같은 분위기에 덩달아 괜히 조급해지고, 뭐든 빨리빨리 결정하고 어느 방향이든 빨리 뛰어가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 남는 것은 피로감…
하루를 살고 나서 오늘 내가 뭐 했나 돌아보면 그저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하루를 다 보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요. 그 많은 활동들, 말들, 생각들이 나와 세상에 얼마나 실제적으로 기여를 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요.
그런 느낌이 싫어서인지, 세상은 내일이면 또 새벽부터 바쁘게 돌아갈 것입니다. 아니 오늘 밤에도 여전히 시끄럽고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색과 성찰과 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예병일의 경제 노트’에서 일본의 어느 빵집 주인이 “빵을 잘 굽기 위해 빵을 굽지 않는 시간을 가진다.”라고 쓴 것을 보았습니다. 일주일에 사흘은 빵집 문을 열지 않는다고… 서평만 읽고 그 빵집 주인의 세계를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빵 굽지 않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내는지 알 수도 없지만, 그 빵집 주인은 확실히 세상을 다르게 사는 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번역가도 “번역을 잘 하기 위해서 번역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세상 많은 빵집 주인들은 그런 빵집 얘기를 들으면 “배부른 소리!”, “돈이 이미 많으니까 그렇지!”,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그렇게 사흘씩 쉬어?” 등의 냉소나 신경질적인 고함으로 응답할 것입니다. 현재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런 응답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쉼 없이 빵만 구워서는 세상을 보지도 못하고, 한 때는 즐거웠던 빵 굽기가 어느새 고단한 노동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번역을 새로 시작하는 분들로서는 초기의 어려움이 너무 커서 먼 장래를 보면서 설계해 나가고 지금 하는 일을 즐기고 하는 것이 현실성 없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 힘든 시간을 저도 보내 봤기 때문에 그런 목소리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멀리 보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오히려 제자리에 맴돌거나 엉뚱한 데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번역은 마라톤 같은 것입니다.
제아무리 굳은 결심을 가지고 번역 일을 시작해서 열심히 프로필 만들고 비딩하고 해 봐도 어차피 처음에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초보니까 업계에서 알아주지 않는 것이죠. 그러면 실망하고 괜히 자격지심에 빠지고 그럴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잠시 동안의 시장의 반응에 기초해서 평가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몇 달 하다가는 일 년도 못되어 그만두고 말지요. 프리랜서 번역가는 해 보니까 배고픈 길이라고 하면서…
그러지 말고 번역은 마라톤이라 생각하고 그 긴 마라톤을 잘 달려갈 수 있는 방법과 자세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마라톤은 누구를 이기기 위한 마라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속도로 꾸준히 가서 완주하는 것이 성공인 그런 마라톤이겠지요. 그런 시각으로 번역가의 일과 삶을 바라보면 매일 일하는 시간 혹은 일하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채워 나갈지가 달리 보일 것입니다.
옛날에 positive feedback과 negative feedback 개념을 배웠던 생각이 납니다. “너 참 잘 했어!”하는 그런 feedback 말고, 물리적 현상을 말할 때 쓰는 feedback은 그야말로 ‘되먹임’이죠. Positive feedback은 되먹임 때문에 output이 점점 커지는 현상이고, 반면에 negative feedback은 되먹임으로 때문에 output이 계속 제자리로 돌아가는 현상입니다.
Positive feedback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끔 마이크를 잘못 만졌을 때 ‘삐~~’ 하고 귀 찢어지는 소리가 나는 수가 있잖아요? 그건 스피커와 마이크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스피커에서 나온 작은 소리가 다시 마이크로 feedback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가 다시 마이크로 들어가고 그것이 좀 더 큰 소리가 되어 스피커에서 나오고, 그것이 다시 마이크로 들어가고… 그런 과정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나니까 그렇게 순식간에 큰 howling이 생기는 겁니다.
Negative feedback은 실내 온도 조절 시스템 같은 것에서 볼 수 있는데, 히터를 틀어서 온도가 너무 올라가면 그것이 스위치 속의 어떤 것을 팽창시켜서 히터가 꺼지게 만들고, 반대로 히터가 꺼져 있어서 온도가 너무 내려가면 그것이 스위치 속의 어떤 것을 축소시켜서 그 영향으로 히터가 켜지게 만드는데, 이렇게 되면 그것은 negative feedback system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negative feedback 시스템 때문에 실내 온도가 일정 범위에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저는 번역가의 일과 삶은 긴 시간을 두고 positive feedback이 이루어져 가는 식으로 설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이 지나면 번역가의 일과 삶에서 이루어 낸 작은 결과가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작용하여 이전보다 좀 더 나은 결과를 낳고, 바로 그 나은 결과가 다시 번역가의 일과 삶에 다시 한 번 보탬이 되는 그런 시스템으로 설계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무리 느려도, 혹은 세상 사람 누가 뭐라 해도, 소신을 가지고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겠지요?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은 길이라면, 힘들어도, 때로 막막하고 불안해도,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히 그리고 작은 일에 욕심부리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번역가가 작은 프로젝트 하나를 받아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정성껏 작업을 했다 쳐요. 남들은 30분이면 다 할 것을 열심히 사전 찾고 구글도 열심히 찾아서 배경 지식도 쌓고 전문 용어들도 확인하고 하느라고 무려 3시간이 걸렸다고 합시다. 그걸 옆에서 남들이 보면 참 한심한 일일 겁니다. 3시간이나 열심히 일해서 돈을 얼마나 벌었냐고, 그 무슨 생고생이냐고, 대충 해서 보내도 누가 뭐랄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사서 고생하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누가 그렇게 말한다기보다는 실은 자기 내부에서부터 끊임없이 들리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겠죠.)
하지만 번역가의 길이 마라톤이라고 생각하고 그 긴 여정을 간다고 생각하면 그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번역 작업이란 것이 그저 언어를 잘 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를 구체적으로 찾아보고 확인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다 하고 나서 다시 읽어보면서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독자 입장에서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매번 작업을 해 나가면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 번역가의 실력 향상
- 질이 높은 TM 생성
- 고객의 좋은 평가
이 세 가지 결과는 모두 번역가에게 positive feedback으로 작용합니다. 번역가는 자신이 한 프로젝트를 정성껏 완수했다는 만족감이 생기고 또 다른 것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것입니다. 게다가 TM이 생겼으니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다음에 비슷한 문장, 비슷한 용어가 나오면 이번보다는 훨씬 빠르고 쉽게 그것을 번역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성실한 작업은 고객의 좋은 평가로 이어지고 그래서 다른 프로젝트들도 계속 나에게 오게 만드는 중요한 발판이 됩니다.
몇 가지 방법으로 위의 과정을 가속시킬 수 있는 방법들도 있습니다. 제 블로그에서 그런 것도 다룰 것입니다. ‘방법’이라는 제목의 많은 포스트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이런 시스템 자체입니다. 아무리 느려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positive feedback system을 갖추고 그것을 끊임없이 시행해 나간다면, 그 번역가의 미래는 밝습니다.
번역가의 길이 마라톤이라고 생각할 때 또 하나 조정해 볼 수 있는 것은 공부와 취미생활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빵 굽는 사람처럼 번역가도 번역 작업에서 떠나 다른 것들에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어차피 일만 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기도 하거니와, 번역 실력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번역만 많이 하고 오래 앉아있다고 마냥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번역 실력은 긴 우회 과정(detour)을 거쳐 만들어지고 그래서 장기적으로 보아 번역 사업은 고도의 지식 사업(knowledge business)입니다. (이것은 제가 초기 포스트에서부터 말씀드린 것입니다. 번역 비즈니스는 언어 비즈니스이고 지식 비즈니스라고.)
자신의 제 2 언어(모국어가 아닌 언어)의 세계에 풍덩 뛰어들어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며 독서도 하고 영화도 보고 오락도 즐기고 다른 사람과 대화도 해야 비로소 그 언어 세계의 맛과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좋은 번역이 비싼 이유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시간이 정말 정말 정말 정말 많이 걸리거든요. (얼마나 많이 걸리는지는 다음에 따로 한 번 다루겠습니다.) 그러니까 일이 없으면 걱정하고 있지 말고 차라리 열심히 취미 생활을 하고, 놀고,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공부도 하십시오. 물론 초기에 번역의 세계 자체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일정 단계를 지나면 그것보다 훨씬 더 넓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 세계에 푹 빠져들어야 합니다.
뭐 이런 측면에 대해 “아휴, 번역 잘 하려면 그렇게까지 해야 돼?”하고 반응하실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보십시오. 번역가의 삶이 왜 멋진 줄 아십니까? 그렇게 하면서 살 수 있으니까 멋진 것입니다. 본인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번역가의 삶의 라이프스타일로 생각하면서 신나고 재미있게, 하루하루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번역가의 삶이 멋지게 되는 것입니다. 베짱이처럼. 게다가 언어와 언어 사이, 문화와 문화 사이의 깊고 깊은 골짜기 너머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고도의 지적 작업을 하려면 어차피 그런 ‘딴 짓’은 필수입니다(지식과 실력을 쌓는 우회 과정). 언어적 지식적 폭이 없이 문서만 좁고 좁게 들여다본다고 좋은 번역이 나오겠습니까?
에이전시나 최종 고객이 그런 측면을 못 알아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값어치 있는 번역물은 그렇게 많은 우회 과정을 거쳐 언어적 이해와 문화적 이해와 전문 분야에 대한 이해까지 갖춘 수준 높은 번역가에게 맡기려는 최종 고객과 에이전시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일하시면 됩니다. 물론 처음 번역을 시작하시는 분들은 비딩에 많이 의존할 것이니까 그 과정에서 에이전시들은 그저 번역료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싼 가격에 일을 많이 많이 해야 번역으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방향으로 길을 잡으시면 그건 파멸의 길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행복한 번역가 되기는 틀렸습니다.
번역을 막 시작하려는 분들께 제가 조언을 잘못 드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제 말을 오해하실까 봐 조심스럽기도 하고…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 보고 결정하십시오. 정신없이 마구 달려갈 것인지, 아니면 내 길을 긴 마라톤으로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바른 방법으로 걸어갈 준비를 하고 그렇게 매일 발걸음을 떼 나갈 것인지. 제 생각에는 행복한 번역가의 길은 후자일 것입니다.
[…] 그 내용도 보다 긍정적인 것을 받을 수 있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번역가의 길은 마라톤 […]
[…] 가격 인상도 기하기 힘든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가는 것입니다. 나아가 번역가의 삶은 마라톤인데 그런 면에서 꼭 필요한 생활의 리듬과 번역가의 삶을 즐기는 여유, […]
번역도 신뢰를 쌓아가는 지난한 길이 요구되는군요…
신용과 평판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경험과 철학에서 우러난 조언, 가슴깊이 간직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