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 프로토콜

통역 프로토콜은 통역하는 동안 그리고 통역 전후에 지켜야 할 사항들을 총칭합니다. 문서화되어 있고 암기해야 할 것도 있지만 크게 봐서는 상식에 속하는 것도 많습니다. 대략 나열해 보면 이렇습니다.

중립성

이건 통역가가 통역을 제공받는 양 당사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함을 말합니다. 싸우러 만나는 것도 아닌데 웬 중립성이냐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실은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캐나다에서는 그런 상황이 더욱 많은 것 같습니다. 이민국이나 공항 등에서 통역을 하게 되면, 한국 사람들은 통역가가 자기 편이 되어 줄 것으로 짐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 이국 땅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같은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갑고 안도가 되었을지는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통역가가 출신이 한국이라고 한국 사람 편을 들면서 통역을 할 수는 없습니다. 불법입국을 도와줄 수도 없고, 심사에 불리한 말을 듣고서도 그 사람을 돕기 위해 들은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생략할 수도 없습니다. 철저히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직업 정신이요 자신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길이며, 크게 봐서는 캐나다와 통역을 받는 한 당사자인 한국 사람에게도 좋은 길입니다.

통역가를 보자 급히 다가와서 작은 소리로 “통역가님, 실은 제가 사정이 있어서 가족이 다 같이 입국하려고 하는데, 다른 가족은 저쪽 다른 줄에 있고 각각 개인 입국인 것처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이런 말을 들으면 통역가는 있는 그대로, 그냥 영어로 쫘라라락 기계처럼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겁을 하고 말을 끊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방지하려면 통역가가 한국 사람과만 있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통역을 받는 양 당사자가 이미 만나 함께 있는 자리에 통역가가 마지막으로 합류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또한 (특별히 이런 상황에서는) 통역이 끝난 뒤에 빨리 자리를 뜨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통역가는 변호사도, 이민 브로커도, 정착 상담사도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조언을 해 줄 수는 있지만 결코 통역에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통역한다

통역 훈련 받을 때 강사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여러분은 기계라고 생각하십시오. 귀에 영어가 들리면 여러분의 통역어(한국어), 여러분의 통역어가 들리면 영어로 자동 발사하십시오.” 이 원칙이 중요한 주된 이유는 통역과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 정보의 불균형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또 병원에서는 환자 가족이 환자와 함께 인터뷰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환자 가족이 주로 영어로 직접 의사와 대화합니다. 그러면 저는 자동으로 그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합니다. 영어를 모르는 환자를 위해서요. 또 환자와 환자 가족이 한국어로 서로 대화하면 저는 자동으로 그들 사이의 대화를 영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의사를 위해서요. 기계 같죠. 그러나 그게 통역가의 의무를 제대로 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역할을 분명히 한다

통역은 그저 상대방이 방금 한 말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 최종 목표는 커뮤니케이션이지만 그것 자체가 커뮤니케이션은 아닙니다. 아무리 통역을 잘 해도 여러가지 이유로 커뮤니케이션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앞 포스트에서 썼던 ‘한국식 화법’ 때문일 수도 있고, 서로 들을 마음이 처음부터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 환자가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 의사의 말을 못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통역뿐만 아니라 모든 대화가 그렇지요. 그러므로 통역가의 역할은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없습니다. 쌍방간의 합의나 공감이나 문제 해결은 더더욱 아닙니다. 통역가가 그 점을 처음부터 분명히 알아야 하고 또 상대방(통역을 받는 두 당사자)에게도 분명히 알려 주어야 합니다.

프로토콜 요약 문구

위의 원칙들을 잘 이행할 수 있는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통역하기 전에 자리에 딱 앉자마자 주문처럼 외운 문구를 양 당사자에게 말해 주는 겁니다. “Good morning!” 해도 그런 것도 무시하고 제 할 말을 먼저 합니다.

“저는 오늘 두 분을 위해 통역할 OOO입니다. 통역 내용은 비밀로 취급하고 발설하지 않습니다. 저는 들리는 대로 통역할 것이며, 들리는 모든 것을 통역할 것이며, 두 분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킬 것입니다.”

제가 본래 전수받은 문구는 저것보다 훨씬 길고 딱딱하지만 핵심만 추리면 저렇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confidentiality, completeness, neutrality를 약속하고 경고한 것이죠. 통역을 시작하기 전에 매번 저걸 양 당사자에게 말하는 겁니다. 한국어로 말하고, 영어로 말하고. 처음 만나는 당사자들이건 벌써 열 번 이상 만난 당사자들이건 꼭 말합니다. 이건 약속이자 경고입니다. 역할 한계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하면 상대방이 통역가의 역할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고, 허황된 기대를 가지지 않게 되며,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게 되는 효과도 있습니다.

예컨대 대화하다 상대방의 입장이 맘에 안들면 “저런 XX 새끼”하고 혼자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그것도 한국말로 하는 욕을 상대방은 듣지 못할 것으로 짐작하는 거죠. 그럼 통역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바로 통역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고 경고했으니까요. 그럼 영어를 하는 사람은 “What did you say?” 하며 바로 발끈하죠. 그래서 미팅이 파투가 나는 것은 통역가의 책임이 아닙니다. 통역을 아주 잘 한 겁니다. 예가 좀 부정적이지만 실제 이런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통역가가 이런 원칙을 지키기 때문에 통역이 잘 되고 양 당사자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양 당사자가 통역가의 역할을 오해하지 않고 잘 새겨들었기 때문이지요.

Bryan
Bryan

브라이언은 의료분야에서 한영번역을 하는 번역가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내와 둘이 삽니다. 여행과 독서와 음악과 커피를 좋아합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행복한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