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과 번역의 만남: 통역 이야기 시리즈를 끝맺으며

이번 포스트는 통역 이야기 마지막 편입니다. 통역을 접은 이야기는 ‘내 짧은 통역 커리어의 시작과 끝‘에서 이미 했기 때문에 그 얘기를 다시 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통역과 번역의 미래에 대한 저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통역과 번역은 각각 소리와 텍스트라는 다른 매체를 이용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이니 어찌보면 쌍둥이 같습니다. 그래서 통역 능력을 가진 사람은 번역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크고 번역 능력을 가진 사람은 통역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크지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그런데 여러가지 이유로 통역과 번역은 쌍둥이 같으면서도 서로 매우 다른 직업처럼 여겨졌습니다. 통역은 가방에 사전과 수첩을 넣고 집을 나서는 사람이고 번역하는 사람은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죠. 소리와 텍스트가 서로 섞이기 힘든 원수지간은 아닌데, 아마도 통역의 현장성 때문에 실제로 한 사람이 통역과 번역을 병행하기가 힘든 것이 큰 요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서로 잘 만나지 않던 번역과 통역이라는 쌍둥이가 상봉을 하는 일이 꽤 많습니다. 기술 발전 덕분입니다. 그런 사례를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보겠습니다.

만남의 예

Sight interpretation

당장 앞 포스트에서 설명드린 sight interpretation만 해도 텍스트와 소리가 만나고 있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그림으로 정리해 둔 포스트가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다른 언어로 보고서 작성

방문을 하거나 전화로 인터뷰를 해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종의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도 가끔 의뢰를 받습니다. 보험 처리와 관련된 경우도 있고, 시장 조사를 심층적으로 하기 위한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어로 인터뷰를 하고 내용을 한국어로 요약해 두었다가 영어로 보고서를 써 보내는데, 이런 경우도 소리와 텍스트가 만나지요.

Conference call을 이용한 통역

통역은 현장성이 중요한데 실은 요즘은 전화로 통역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conference call이라는 기능을 이용하여 3자가 통화하는 것이죠. 예컨대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은 매우 바쁜 곳이고 온갖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통과하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통역가들이 상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런 곳은 아예 conference call로 통역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서 미국 병원들에서 환자와 소통하는 일에 conference call 시스템을 이용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다른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이 일만 전업으로 합니다. 전문화의 힘… 아무튼, 이것도 통역과 관련된 고정관념을 많이 흔드는 형태지요. 여기에는 텍스트가 거의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100% 통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기술의 발전은 이 선도 금방 허물어 버릴 겁니다. 예컨대 저는 김호빈 씨와 스카이프로 통화하는 동안 텍스트 창을 통해 계속 문서와 링크를 주고받습니다. 물론 한국어로 통화하지만 영어 문서를 주고받게 되면 이게 단일언어 통화인지, 통역인지, 번역인지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도 많습니다.

Transcription

가끔 비딩에 나오는 일 중에 transcripti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용어는 본래 소리를 텍스트로 적는 것을 가리킵니다. 국회 속기사가 하는 일, 연설이나 인터뷰를 받아적는 일 등이 있는데 주로 monolingual task죠. 그런데 번역 에이전시들이 이 말의 의미를 살짝 바꾸어 버렸습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 적는 것으로요. 예를 들어 한국어로 인터뷰한 내용을 영어 텍스트로 쓰는 작업입니다. 이건 통역의 한 부분(한국어를 귀로 듣고 이해하는 것)과 번역의 한 부분(이해한 것을 영어로 쓰는 것)을 결합한 것입니다. 영상물에 자막을 다는 일(subtitling)도 이런 transcription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공간 제약이 있고 어느 정도 동시성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면에서 subtitling은 transcription이나 번역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Transcription과 subtitling은 통역 기술과 번역 기술 둘 다가 필요하고, 텍스트가 없으니 캣툴을 이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훨씬 더 비싼 값을 쳐 주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싹 무시하고 마치 단순한 작업인 것처럼 제시하는 것을 보면 화가 좀 납니다. 저도 옛날에 좀 하다가 요즘은 레이트가 안 맞아서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건 뭐 별개의 사안입니다만 아무튼 여기서도 번역과 통역이 만나고 있습니다.

음성인식 기술을 이용한 번역

저는 꽤 오래 전부터 음성인식 프로그램을 번역에 이용해 왔습니다. 요즘은 제가 특화한 분야가 이걸 이용하기가 적당하지 않아서 잘 쓰지 않습니다만, 가끔 제 주된 분야가 아닌 분야를 번역할 때는 이걸 씁니다. 예를 들어 텍스트 메시지를 주고 받은 화면 캡처 같은 것이 경찰에 제출할 증거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그냥 눈으로 보고 영어로 말해버립니다. 이건 제가 앞에서 이미 소개한 sight translation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말한 소리가 다시 텍스트가 되는 것이 다를 뿐이지요. 구글이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 인식도 이제 정말 잘 합니다. 여러분도 이용해 보십시오.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써 둔 포스트가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희망으로 준비합시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번역과 통역이라는 쌍둥이의 만남은 우리 시대에 벌어지는 새롭고 역사적인 현상이라는 겁니다. 피디에프 문서를 소리로 읽어 주는 기술(물론 monolingual)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또 스카이프나 구글행아웃 같은 기술이 어떤 미래를 열어줄지 아무도 모릅니다. 미래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온 번역과 통역이라는 두 별개의 영역을 융합한 새로운 영역이 제대로 탄생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영역에는 번역 분야에서 지금까지 이루어진 많은 기술적 진보(예컨대 CAT tool, 구글의 AI 번역, 음성인식 기술 등)가 적용될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위에서 열거한 것들은 그 전조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언어 전문가 여러분, 마음 문을 열고 조금 더 멀리 보고 관심도 조금 더 넓혀 보십시오.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를 희망으로 준비합시다. 전문가에게 미래는 늘 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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