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활한 통역 진행의 요령

통역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요령을 몇 가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통역 프로토콜 요약 문구로 시작하라

통역 프로토콜이 무엇이고 왜 그런 것이 필요한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통역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이 문구를 양 당사자에게 말해 주고 시작하면 통역이 원활하게 진행될 확률이 훨씬 더 높아진다는 점입니다. 양 당사자가 통역 진행에 걸림돌이 될 확률이 낮아지니까요.

통역 단락은 가능하면 짧게 잡아라

특별한 상황(긴 강의, 고객의 특별한 요청 등)이 아니라면, 통역은 가능하면 문장 단위로 잘라 하는 것이 좋습니다. 통역가의 머릿속에 담고 있어야 할 정보의 양이 줄어드니까 덜 피곤합니다. 그런데 고객이 통역에 익숙하지 않아, 말을 끊지 않고 계속 이어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문장이 끝난 시점에서 과감하게 치고 나오셔야 합니다. 그러면 고객도 ‘아, 통역할 시간을 주어야 하는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자꾸 반복되다 보면 고객도 학습이 되어서 한 문장을 말하고 나면 입을 다뭅니다.

그런 학습이 잘 안되어서 도대체 말을 끊을 줄 모르는 고객을 만나면 어떻게 할까요? 치고 나오려고 해도 한 문장 자체가 끝나지 않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기 힘들지만 이런 분이 가끔 있습니다. 말을 할 때 문장이 끝나지 않는 분들 말이죠.) 이럴 때는 손을 쓰면 좋습니다. 손을 내밀어서 말을 끊으라는 시늉을 하는 거죠. 무례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보다 통역이 잘 진행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한번 해 보시면 그리 무례하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런 방법이 좋은 것은 말을 끊기 이해 통역가가 별도의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통역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는 통역이어야 당사자들에게 내용 전달이 잘 됩니다. 자꾸 통역이 끊어지고 통역 절차에 대한 부탁, 짜증, 실랑이 등이 나오면 서로 힘듭니다.)

메모 잘 하기

메모는 당연히 해야 합니다. 저는 딱 한 번, 메모하지 않고 강의를 통역하는 사람을 보았는데, 머리가 좋다고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잘 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떻게 한 단락을 다 머릿속에 넣고 재생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는 것입니다. 메모는 꼭 해야 합니다.

메모는 문장을 받아적는 것이 아니라 핵심 단어만 빨리 적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단어를 보면서 문장을 말로 하는 것입니다.

메모를 할 때는 한국어로 메모하시기를 추천합니다. 한국어를 듣고도 한국어로 메모하고 영어를 듣고도 한국어로 메모하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한국어 단어는 영어 단어보다 압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흥미’ ‘운전’이라고 메모하는 것이 ‘interest’ ‘driving’이라고 메모하는 것보다 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영어가 더 편한 분들은 영어로 메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둘 다 해 보았는데 한국어 메모가 더 편한 것 같습니다. 다만 영어를 듣고 한국어로 메모할 때 한국어 단어가 빨리 생각나지 않거나 그런 단어가 아예 없는 경우는 영어로 써 두어야겠죠.

또 메모는 글자만 쓰란 법 없습니다. 자기 나름의 기호를 정해 두면 좋습니다. 속기사들이 하는 것처럼요. 자꾸 반복되는 단어나 전문용어를 기호로 정해두는 것도 좋습니다. 물론 연습이 필요한 일입니다만, 전문화해서 같은 분야를 반복적으로 통역하는 분이라면 메모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어느 정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설명하지 말라

통역가의 임무는 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상대방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일이 아닙니다. 즉,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은 통역가의 책임이 아니라는 겁니다. 의사가 환자를 만나 대뜸 “췌장암 가능성이 있으니 CT 찍읍시다” 했다 칩시다. 그걸 통역하면 ‘췌장암’은 알아들을 가능성이 크고 ‘CT’는 못 알아 들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요? CT가 뭔지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서 통역하나요? 아니죠. 절대로 그럼 안됩니다. 환자가 못 알아듣는 것은 결코 통역가의 책임이 아닙니다. 환자가 알아듣게 하는 것은 의사의 책임입니다. 따라서 통역가는 그냥 듣는 대로 통역하면 됩니다.

통역된 말을 듣고 놀란 환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의사가 아닌 통역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아, 저, 선생님, 죄송하지만 씨티라고 하셨어요? 그게 뭐죠?” 그럼 어떻게 하나요? “아, 네, CT라는 건요, …” 이러면 통역이 엉망진창이 됩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의사는 벙쩌서 ‘지금 이 둘이서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 거지?’하고 생각할 겁니다. 통역가는 이런 상황에서 즉시 영어로 통역해야 합니다. “Sorry, doctor, did you say CT? What is that?” 그러면 의사가 CT가 뭔지 설명해 줍니다. “CT refers to….” 통역가는 그걸 다시 통역해야죠.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고 간단합니다. 하지만 이런 원칙을 철두철미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오류가 생기지 않고 중요한 정보를 잘못 전달하여 쓸데없이 책임을 질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대화는 어디까지나 두 당사자가 하는 것이지 통역가가 대화의 한 주체가 되면 안 됩니다.

일방에 유리하게 행동하지 말라

이건 통역 프로토콜에 있느니 당연히 그리 해야 하는 것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다 버리고 공평하게, 중립적으로 통역해야 합니다. 이건 code of ethics이기도 하지만, 실은 통역가가 통역을 잘 진행할 수 있는 요령이기도 합니다. 머리를 과도하게 쓰지 않게 되거든요. 오직 언어적 측면에만 몰입해서 통역을 할 수 있거든요. 어느 당사자를 위해서 걱정하거나 애를 쓰거나 말을 살짝 바꾸어서 더 긍정적인 단어로 바꾸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통역만 열심히 하십시오. 그게 양 당사자에 대한 약속이고 통역가의 윤리이며 통역을 잘 할 수 있는 요령입니다. 그런 통역가라야 신뢰를 받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통역을 하기 직전, 혹은 지난 번 통역 이후에 통역가가 알게 된 정보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컨대, 절대로 어느 지역에 가면 안 되는 사람을 통역가가 우연히 보았다든가, 절대로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사람에게서 알콜 냄새가 난다든가 하는 정보 말입니다. 그런 정보를 통역가가 상대방 당사자(경찰, 의사 등)에게 알려주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통역가의 의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스스로 매우 복잡한 상황에 연루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정보가 정말 확실한지 여러분이 책임질 수 있나요? 예컨대 사람을 잘못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약은 알콜 냄새가 납니다. 여러분이 선의로 제공한 정보가 도리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통역가는 통역에 집중하면 됩니다. 

통역이 끝난 후에는 잊어버려라

가끔 통역을 하고 나면 마음 속에 연민, 분노, 경멸, 궁금증, 충격 등등 복잡한 감정이 잔뜩 남는 수가 있습니다. 통역이 끝나면 그런 감정도 다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런 것을 잘 해야 스트레스와 과도한 감정이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저도 감정이 강한 편이라 그리 잘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있는 날은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음악 들으세요. 운동도 좋고요. 물론 그런 것보다 더 좋은 건 사람에게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건 confidentiality 프로토콜을 어기는 겁니다. 프로답지 못한 것이죠. 여담으로, 카톨릭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좀 건강하다고 하는데 그건 고해성사를 통해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고해성사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에이전시도 있습니다. 제가 통역 훈련을 받았던 MCIS에서는 그런 상황에서 전화를 해서 털어놓을 수 있도록 전화번호 하나를 제공해 주었지요. 실제로 전화를 하면 전화 받는 사람은 (무성의하게) 듣고 넘기겠지요. 하지만 그렇게라도 털어 놓는 것이 통역가의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예외: 통역을 통해 어느 한 당사자 혹은 양 당사자 모두가 범죄와 연루된 것을 알게 되었다면 경찰에 연락해야 합니다. 그건 confidentiality 프로토콜을 뛰어넘는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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