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공증을 둘러싼 오해와 궁금증

번역 공증이라는 이상한 용어가 있어서 그 용어가 한국에서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늘 궁금했는데, 김호빈 님이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간단명료하고 재미있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 아래 ==

 

 

비자를 신청할 때나 외국 기관에 행정에 필요한 증명서를 제출해야 할 때, 또는 계약서를 번역할 때 공증 사무소라는 곳에 방문하여 소위 ‘번역 공증’을 받아야 한다고들 하지요. 번역 공증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이 글에서는 번역 공증에 관한 오해와 궁금증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번역 공증’이란 무엇인가요?

현재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번역 공증’은 원문과 번역문을 지참하고, 지참한 번역문이 원문과 일치함을 서약한 후에 인증서(CERTIFICATE OF TRANSLATION)를 받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흔히 하는 오해와는 달리 이는 원문의 내용을 공적으로 증명하는 ‘공증(公證)’이 아닙니다. 공증인은 번역문이 정확한 것인지, 오역이 없는 것인지 확인해 줄 수 없습니다. 공증인이 수많은 외국어에 통달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공증인은 사무소에 방문한 번역인이 지참한 번역문을 번역했다고 인증할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공증과 인증은 다르지요. 아마도 사람들이 공문서를 맡기면 공증 사무소에서 원문 번역 + 인증까지 대신하기 때문에, 그리고 번역문 인증을 거치면 그전까지 사문서에 불과하던 번역문이 공적인 문서로 효력을 인정받게 되기 때문에 번역 공증이라는 말이 굳어지게 된 것으로 추측합니다만, 번역인을 공증한다면 또 몰라도 번역 공증이란 법적으로 잘못된 용어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번역 공증을 ‘번역문 인증’으로 통칭하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이 번역문 인증을 신청할 수 있나요?

네, 할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촉탁’한다고 하는데요, 공증 사무소에서 하는 번역과 인증은 별개의 행위이므로 각각 비용이 발생합니다. 행정 문서는 보통 어렵지 않은 문서인 경우가 많은데, 공증 사무소에서는 보통 한 장에 최소 만 원, 많게는 이삼만 원을 번역 대행료로 받습니다. 인증료는 또 따로 내야 하고요. 그러니 번역을 직접 할 수 있다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누구나 공증 사무소에 번역문 인증을 촉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번역문 인증을 촉탁할 수 있나요?

예전에는 번역인의 자격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신분증과 도장만 지참하면 아무나 번역문 인증을 촉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사나 유학원 직원, 심지어 퀵서비스 기사가 공증인 앞에서 선서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비일비재했고, 돈만 내면 100% 해 주었기에 제도의 실효성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2013년 10월 법무부에서 ‘번역문 인증사무 지침’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요, 당시 발표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너무 길어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했는데 그래도 길군요. 중요한 건 밑에서 다시 살펴볼 테니 대충 훑어 보기만 하시면 됩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제5조입니다. 이전에는 외국어를 전혀 몰라도 신분증만 가지고 가면 인증서를 발행해 주었지만, 이제 법무부에서 번역인의 자격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공증인에게 이를 확인할 의무를 부과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정한 번역인의 자격이 대단한 능력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어면 영어, 일본어면 일본어를 아는 사람이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번역 능력 기준 부분을 다시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 기준을 보고 ‘아니, 저게 뭐야?’라고 생각하시는 번역가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법무부 관계자들이 나름 고심한 흔적이 보이기는 합니다만, 사실 번역 능력을 검증할 방법이 없는 현실에서 잣대를 만들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가엾은 기준이 나오고 만 것이지요. 특히 2호에 등장하는 주체는 모두 사단법인과 사립대학교입니다. 여기에서 발급하는 자격증과 성적표는 국가에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에도 ‘한국’이 들어가 있어서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오해하기 딱 좋지요. (사족이지만 한국외국어대학교 신입생 중에는 자신이 입학한 학교가 국립인 줄 알고 오는 학생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름이 ‘한국’, ‘대한’ 등으로 시작하는 기업이나 학교, 단체 중에는 국가에서 세우거나 운영하지 않는 곳이 많습니다. 물론 다 이상한 곳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이름을 팔아 사람을 속이는 부덕한 기업이 번역업계에 더러 있으니 번역가를 지망하시는 분들은 꼭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3호와 6호의 경우 영어영문(영어과, 영어교육과도 다 됩니다), 독어독문 등 관련 학부나 대학원을 졸업하신 분이라면 졸업증명서를, 외국어능력검정시험으로 자격을 증명하시려면 공인어학성적표를 가져가시면 됩니다. 시험 성적은 2년 안에 받은 것이어야 하고, 인증하는 문서와 함께 철하므로 사본도 가져가셔야 합니다. 이제는 오래된 일이지만, 이 지침이 처음 발표된 직후에 공문서 번역 실력이 정말 뛰어나고 경험도 많은 번역가들이 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한동안 번역문 인증을 촉탁할 수 없었다는 여담이 있습니다.

 

4호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에 유학하여 대학교를 졸업하는 경우인데 이럴 때 학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5호는 반대로 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는 경우인데, 이때는 우리나라 대학교 학과를 묻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서약하는 사람이 당연히 한국어 능력이 있음을 전제하고 인증해 주는 것이므로, 만약 외국인이나 한국어 구사 능력이 부족하다고 의심할 만한 사람이 촉탁한다면 공증인이 번역인의 한국어 능력을 확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7호는 1~6호의 자격, 학력, 성적증명이 없더라도 가령 10년 동안 번역업에 종사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를 제출하는 경우입니다. 그렇다고 사업자 등록증만 제출하는 건 안 되고요, 번역 실적을 증명하는 다른 객관적인 자료를 제출하면 된다고 합니다. 요지는 공증인에게 객관적 자료를 제출하여 두 개 언어(한국어,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사실을 소명하면 번역문 인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역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누가 책임지나요?

성적증명서를 번역한 번역인이 고의로 점수를 고쳤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혹은 실수로 오역이 발생할 수도 있고요. 그러나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공증인은 번역이 올바른지, 오역이 없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절차를 거쳐 서약을 하기만 하면 인증서가 발행됩니다. 그렇다면 잘못 번역된 문서로 법적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공증인이 번역인의 자격을 올바르게 확인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인증서를 발행했다면 번역문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번역인에게 책임을 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증인이 돈을 받고 인증을 해 주었으니 공증인도 함께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번역문 인증 행위의 목적은 번역의 정확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요. 가령 한국에서 스와힐리어에 능통한 공증인이 몇 명이나 될까요? 그래서 번역인이 공증인 앞에서 번역문과 원문이 상위 없음을 ‘선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증인의 역할은 번역문보다는 번역인을 인증하는 것에 가깝고, 번역문 인증은 번역문의 책임을 번역인에게 지우는 절차라고 보시는 것이 좀 더 타당합니다. 참고로 이렇게 오역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공문서는 해당 문서를 받는 기관에서도 추가 검증 장치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번역 공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문 인증만이 존재한다.
  1. 번역문 인증은 어렵지 않다. 스스로 할 수 있으면 직접 하는 것이 좋다.
  1. 공증 사무소에서 번역문 인증을 촉탁할 때 법률이 요구하는 자격: 있다. 그러나 이 자격은 직업으로서 번역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1. 번역가가 되기 위한 자격증: 그런 것 없다. (참고 글 – 번역가 자격증과 초벌 번역가라는 존재에 대하여)

 

간혹 3과 4를 혼동해서 ‘번역가가 되려면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고 하던데요?’ 혹은 ‘번역 분야에도 국가 공인 자격증이 있다고 하던데요?’라고 묻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럴 때 올바른 정보를 알려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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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덧붙임]

번역 공증에 대해 어떤 분이 질문을 하셔서 김호빈 님이 답변을 했는데, 그 내용이 다른 분들께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아래에 붙입니다.

 

질문: 

님의 사이트에서 번역공증에 관한 친절한 설명을 접하고 문의드릴게 있어서 이렇게 이멜 보냅니다.

 

번역문 인증지침에 대해서 질문이 있습니다.

번역문 공증이 업무상 필요해서 제가 번역을 직접하고 공증을 받으려고 하는데…

 

전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쳤으며 미국에서 15년정도 실무를 하고 현재는 한국에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시민권자이구요…

 

이런조건으로 제가 번역인으로서 적합한지가 궁금해서 문의드립니다.

바쁘시겠지만 답장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제가 올린 글 내용 대부분이 한국인에게 해당하는 내용인데요, 질문하신 분이 현재 미국 시민권자라고 하시니 법적으로 조금 복잡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당연히 될 것 같지만, 예전에 ‘한국 대기업에서 5년 동안 번역한 경력이 있는 10년차 번역가’가 번역문 인증을 받지 못한 황당한 사례도 있거든요.

원칙적으로 “두 개의 언어(한국어, 해당 외국어)에 능통하여 해당 서류를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 객관적 자료에 의해 공증인에게 소명된다면, 공증인의 책임 하에 번역문 인증사무 처리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한국인이 서약하는 경우 한국어 능력은 당연히 있다고 전제하고 해당 외국어 관련 서류만으로 소명한다”, “만약 외국인 또는 한국어 구사 능력이 부족하다고 의심할 만한 사정이 있는 자가 촉탁하는 경우 한국어 능력에 대한 소명서류를 제출받아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질문하신 분의 상황에 근거하여 포스트에 첨부한 번역문 인증사무 지침 5조 2항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한국인 기준부터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질문하신 분이 한국 국적이라면 문제가 간단했을 것입니다. 제3호 “고등교육법에 의한 대학 또는 대학원에서 해당 외국어를 전공하여 학사 이상의 학위를 받은 사람이 학위증명서 사본을 제출하는 경우”나 제4호 “고등교육법 제33조 제1항에 따라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학력자가 해당 외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의 대학에 유학하여 학사 이상의 학위를 받고 그 학위증명서 사본을 제출하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아주 쉽게 소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한국 대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하셨다면 3호를 적용하여 한국 대학교 증명서 사본으로, 전공 분야가 영어가 아니라면 4호를 적용하여 미국 대학원(전공 무관) 증명서 사본으로 수월하게 소명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번역인이 미국 국적이라면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이때는 오히려 한국어 구사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외국에서 나고자라 한국 대학교를 다닌 경우면 5호를 적용하면 되지만, 질문하신 분 같은 경우에는 3호나 4호, 5호가 아닌 제7호 “기타 이에 준하는 학력, 자격 또는 경력을 갖추어 해당 외국어에 대하여 번역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이 해당 학력, 자격, 또는 경력을 증명하는 자료를 제출하는 경우”를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즉, 질문하신 분 입장에서는 같은 서류이지만 공증인 입장에서는 적용하는 조항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번역문 인증사무 지침 제5조 2항 7호를 근거로 영어-한국어 번역문 인증을 신청하시되, 4호와 5호에 해당하는 한국 대학교와 미국 대학원 학위 증명서를 가져가십시오. 이런 기타 조항은 아시다시피 어떤 공증인을 만나느냐 따라서도 분위기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공증인이 융통성이 없거나 까칠하게 나오면 조금 골치가 아플 수는 있습니다.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만에 하나 공증인이 안 된다고 하면 위에서 말씀드린 내용을 언급하시거나,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다른 공증 사무소를 찾아가십시오. 제가 공증인이 아니다 보니 반드시 된다! 라고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하신 분은 다행히도 한국 대학교와 미국 대학원을 모두 졸업하셨으니 별탈없이 인증을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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