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서 영한 번역과 한영 번역의 가격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리고 어차피 영어와 한국어를 언어 짝으로 가지고 번역을 한다면,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아 그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을까요?
오늘은 그런 것을 알아보기 위해 다소 딱딱할 수도 있는 분석 작업을 하나 해 볼까 합니다.
시장에서 가격이 정해지는 것은 어떤 것의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상대적인 가치에 의해 정해집니다. 예를 들어 공기는 너무도 값어치가 있지만 공급이 거의 무한대이기 때문에 값이 없는 것이고 다이아몬드는 별 효용도 없는 것이(적어도 제게는) 값은 무지 비싼데 그것은 단지 그것이 공급이 적고 수요가 많기 때문인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시장에서 한영 번역과 영한 번역의 수요 공급을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자료가 워낙 없으니까 철저한 분석은 안되겠지만 그래도 TranslatorsCafé에 자료가 하나 있네요. 우선 볼까요?
우선 자료 출처부터 밝히면 http://www.translatorscafe.com/cafe/EN/translation-market.htm입니다. TranslatorsCafé에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자료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지난 한 달 간 이 사이트에 올라오는 job posting들 중에서 상위 60개 language pair를 분석한 자료인데요, 여기서 보시면 한국어 번역 수요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죠. 전체 1위는 영어에서 노르웨이어로 번역하는 것이고, 2위가 영어에서 한국어로, 3위가 한국어에서 영어입니다(accessed on July 21, 2014).
물론 1위와는 꽤 큰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4위나 5위와도 꽤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무역량도 굉장히 많고, 여러 나라에 이민자도 많고, 정부 및 민간 교류도 많고, 여행자도 많고…. 번역 물량이 늘어날 소지는 너무 많죠. 번역가의 미래가 밝아 보이죠? 자, 여기서 영어와 한국어라는 언어 짝(language pair)의 비중은 어느 정도 확인이 되었는데, 이제 조금 더 자세히 보시면, 영한 번역보다 한영 번역의 수요가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도 흥미롭게 보아야 할 부분인데요, 이 부분을 분석하기 전에 먼저 두 가지 관련 개념을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시장에서 꼭 필요한 물건(예컨대 쌀)이 있고, 있으면 좋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물건(예컨대 장식품)이 있다고 합시다. 전자의 경우는 수요는 가격에 비탄력적이고 후자의 경우 가격에 탄력적입니다. 즉, 쌀 같은 것은 값이 올라가도 안 사면 안되니까 가격이 올라가도 그래도 다들 사죠. 그러니까 공급이 부족한 경우에는 가격이 가파르게 올라가죠. 신문에 이른바 무슨 ‘파동’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현상이 발생한 겁니다. 반면에 꼭 필요하지 않은 비필수재는 가격 민감성이 높아서 가격이 올라가면 수요가 줄죠. 꼭 필요하지 않으니까 싸면 사겠지만 비싸면 안 사는 거죠. 그러므로 수요 감소로 인해 가격은 다시 내려갑니다. (그러니까 무슨 ‘파동’이 일어났다고 할 때는 그 상품은 필수재로 보시면 됩니다. 비필수재는 파동 같은 것이 안 일어나니까요.)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과연 번역이라는 서비스는 필수재일까 비필수재일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 대부분에게 번역은 비필수재일 것입니다. 평생 살면서 번역 서비스를 구입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번역해 놓은 책이나 웹 콘텐츠를 읽기는 하겠지만 본인이 직접 번역 서비스를 구매할 일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쌀은 누구나 먹는 것이지만 번역은 누구나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든 번역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번역은 꼭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번역이 필요한 정부기관, 병원, 기업, 국제 소송을 진행하는 변호사들, 특허를 신청하는 기업들 등에게는 번역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입니다. 묘하죠? 그래서 일반인들을 아예 다 제외하고, 번역 시장 안에서만 번역 서비스를 생각하면, 제 의견에는 번역은 ‘필수재’입니다. 가격이 비싸도 해야 할 번역을 안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번역 시장 안에서 번역 수요는 ‘가격 비탄력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영 번역과 영한 번역의 수요와 공급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절대적인 양은 이 표에서 보듯 영한 번역이 한영 번역보다 더 많습니다. 비록 위의 표는 한 달 간의 흐름만 분석한 것이지만 늘 그랬습니다. 그러나 비율로 보면 한영 번역의 비율이 높습니다. 즉, 한영 번역가의 수에 비한 한영 번역 건수가, 영한 번역가의 수에 비한 영한 번역 건수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영 번역이 2위이고 영한 번역이 3위인 거죠.
“그게 뭐?”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번역료와 관련하여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고요? 번역은 ‘가격 비탄력적’이거든요. 그래서 필수재 시장에서 수요 공급이 조금 차이가 날 경우, 가격은 차이가 많이 납니다. 이 부분은 구체적인 자료로 보여드릴 길이 없어서 제 경험으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데요, 저의 한영 번역은 영한 번역보다 약 1.5배 비쌉니다. 위의 자료에서 수요 공급의 차이 비교는 겨우 7% 정도 차이지만, 이것이 가격 비탄력적인 시장에서 가격으로 나타날 때에는 50%의 차이로 나오는 것이죠. 이것은 한영 번역의 타깃 문서의 영어 단어 수, 그리고 소스 문서의 영어 단어 수를 비교한 값입니다. (용어가 이해가 안 되시는 분은 용어 설명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한 번역보다는 한영 번역의 가격을 인상할 여지가 더 많이 느껴집니다. 한마디로 한영 번역이 영한 번역보다 더 수지가 맞는 것이지요.
물론, 어떤 번역가가 한영 번역을 하느냐 영한 번역을 하느냐 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죠. 대부분의 경우, 자기 모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니까, 일단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에게는 한영 번역보다는 영한 번역이 주어질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이 더 쉽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가 한 이삼 년 번역을 했더니 Proz에서 한영 번역 ‘Pro’ 타이틀에 도전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오더군요. 그 분야에 Pro 타이틀이 있는 사람이 너무 적다고요. 그때부터 수요 공급 문제에 대해 생각을 좀 깊이 생각하고 방향 조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좀 귀찮긴 했지만 Pro 타이틀 과정을 거치고 나니 한영 번역의 물량이 점점 많아지더군요. (사실 정확한 인과관계야 저도 잘 모릅니다. 한영번역에서 Pro 타이틀이 있다고 실제로 번역 물량이 늘어났는지는 알기 힘들죠. 에이전시 설문조사를 해보기 전에야.) 저도 그쪽으로 점점 힘을 쓰기도 했고요. 그 결과 지난 한 달 동안 제 매출액을 한영 번역과 영한 번역으로 나누어 비교해 보니, 매출의 74%가 한영 번역에서 나왔더군요. 이것은 물량도 물량이지만 그쪽이 rate가 높은 것도 중요한 요인이죠.
이와 같이 장기적으로 보아서는, 절대 물량은 적지만 경쟁이 덜한 한영 번역 쪽으로 방향을 잡아 나가는 것도 좋은 전략입니다. 물론 그러려면 native speaker에 준하는 언어 숙련도가 필요하지만요.
안녕하세요? 번역가님의 블로그를 정독 중인 스무살 대학생입니다.
한강의 2007년 작 가 영어로 번역되어 맨부커상을 받은 것을 보고 한영번역의 필요성을 많이 절감했습니다.
저도 우리나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번역가가 되어 외국에 한국문학을 알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또 크리스챤으로써 우리나라의 훌륭한 신앙 도서들(ex. 내려놓음 같은.. 아직 영어로 번역이 안 되었더군요)을 번역하여 수출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요.
번역가님께서 올려 놓으신 번역가의 적성 게시글 등을 보면 저와 잘 맞다고 느꼈어요.
수능 끝나고 간단한 논문 번역 알바도 했었고(영한이긴 합니다만), 대학 원어 수업에서 영어로 proposal을 작성하는 게 과제여서 최대한 잘 쓰려고 사전 계속 찾고 첨삭도 받고 그랬는데요. 힘들었지만 저에게는 ‘어떻게 하면 더 잘 쓸까’ 고민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객관적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름 언어적인 감각이나 예민함(?)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ㅎㅎ;;
그런데 이 꿈을 이루기에 당장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확신도 없네요.
일단 20년 간 토종 한국인으로 살아서 영어권의 문화나 영어 글쓰기 등을 익히려면, 그것도 아주 원어민처럼 잘 하려면(어쩌면 원어민보다 더 글을 잘 써야겠죠) 당장 해외로 떠나야 될 것만 같고..
만약 번역가가 되기 위해서 외국에 살아야 한다면 그럴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석박사를 해외에서 취득하는 게 목표고 우리나라보다는 해외 취업을 하고 싶구요.
사실 대학 공부에 회의를 좀 느껴서 유학 가는 것도 알아봤습니다. 마음에 결심만 선다면 휴학하고 유학 준비할 생각입니다. 다만 제일 염려스러운 것은 비용..이고 또 제가 교회에서 맡은 일과 과외해주는 학생들이 많아서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내성적인 제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이런 점들 때문에 아직은 망설이게 되네요.
일단 지금은 지리산 청년님을 본받아 영어성경을 구입해서 암송하려구요!
그렇지만 당장 시급한 고민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느냐 마냐인 것 같습니다. 번역가를 향한 꿈을 품은 지금은 하루 빨리 해외로 나가고 싶은 생각만 간절하네요. 너무 성급한가요? 물론 막상 나가려니 두려움 반 걱정 반이긴 합니다만..
아직은 어리고 철 없는 걸 알지만 이런 제게 조금이나마 조언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아이쿠, 이런 글을 받으면 저는 아주 부담스럽습니다. 너무 큰 문제를 저같은 사람에게 의논하시다니요…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지 않은 제가 이런 중요한 문제에 감히 조언을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만 원론적인 말씀만 드리자면 외국어를 잘 하려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가서 사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길인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비록 번역은 글을 다루는 일이지만 글을 넘어서는 언어 세계 전반에 대해 넓은 지식이 있어야 하고 문화적인 이해가 있어야 짧은 글 하나도 제대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렇게 큰 일은 다른 측면도 많이 고려해야 할 터이니 저처럼 먼발치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결정하지 마시고 가까이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