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중첩된 고객

 

지난 글에서는 번역 시장의 구조를 살펴보았는데, 거기서 최종 수요자, agency, 그리고 번역가가 어떻게 중첩적으로 만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고, 왜 그런 구조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드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러한 번역 시장의 구조가 번역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 번역가는 어떻게 일을 발견할 수 있을지, 혹은 번역가에게 고객은 누구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첩된 고객

 

지난 번 글을 통해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알아차리셨겠지만, 번역가의 고객은 이중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번역가는 최종 수요자와 agency라는 두 가지 종류의 고객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두 가지 종류의 고객이라기보다는 중첩된 고객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것은 번역가에게 독특한 어려움을 제공합니다. 고객이 한 종류가 아니라 두 종류이니까요. 그리고 그 두 종류의 고객을 다 만족시켜야 하니까요.

 

얼핏 생각하면 어차피 최종 수요자는 만나지도 못하고 그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과연 그런 사람들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번역의 대가는 결국 직접적 고객인 에이전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최종 수요자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종 수요자가 만족하지 못하면, 궁극적으로는(시간 차는 있겠지만) agency도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번역가는 당장 직접적으로 상대하는 agency도 만족시켜야 하겠지만 결국은 최종 수요자(기업, 개인, 정부 기관 등)의 필요가 무엇인지 늘 깊이 생각하면서 작업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종 수요자는 도대체 왜 번역 작업을 의뢰할까 하는 생각입니다. 실은 최종 수요자도 고객이 있는 셈입니다. 최종 수요자가 개인인 경우에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번역 작업을 의뢰하겠지만, 정부 기관이나 기업인 경우에는 그들의 고객이라고 할 수 있는 보다 일반적인 독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번역가의 중첩된 필요

 

자, 여기서 정리를 해 보면, 번역가는 다음과 같은 중첩된 필요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agency를 만족시켜야 한다.
  • 최종 수요자(및 최종 수요자의 고객인 독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런데 agency의 필요와 최종 수요자의 필요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조금은 다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최종 수요자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하는 것은 사실 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종 수요자인 독자층이 최종 수요자가 전달하기를 원하는 원문(source document)을 번역된 문서(target document)를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한 번역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명확해지는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agency의 필요는 무엇일까요? agency는 위에서 언급한 좋은 번역, 정확한 번역 외에도 자신만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앞의 글에서 제시했던 그림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습니다.

 

Picture27

 

이 그림을 보시면 에이전시들은 자신의 최종 수요자를 설득하여 일감을 받고 좋은 결과물을 제공하여 그들의 신뢰를 얻고 충성도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간에 경쟁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양한 전략을 가지고 경쟁에 참여합니다. 또 그들은 시장에서 각각 다양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고가 시장, 저가 시장, 어느 특정 분야(IT, 금융, 특허, 엔지니어링, 의료, 법률 등등)의 시장 등에 자신을 자리매김하면서, 그 시장에서 최종 수요자들에게 때로는 질로, 때로는 가격으로, 때로는 스피드로, 때로는 용어와 개념의 일관성으로, 자신의 고객인 최종 수요자들에게 자신의 장점과 경쟁력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역가는 이러한 agency의 입장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는 그 agency와 함께 성장해 갈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입니다. 운명을 같이 할 수도 없고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들의 피고용자로서가 아니라 동반자로서 말입니다. 이전 글들에서 제가 드린 말씀을 기억하시죠? 번역가가 이러한 시장의 구조를 모르고 혹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은 그저 주어진 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해서 넘겨주기만 하면 끝난다고 생각하고 그런 자세로 일을 하면, 발전성이 없습니다. 또 그런 번역가들하고만 일하는 agency는 그것 자체가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도태될 겁니다. 왜냐하면 agency라고 하는 것은 번역 작업 자체를 할 줄 모르는 번역 사업 브로커일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번역가가 생각을 바꾸어서 agency를 번역가의 마케팅 부서로 생각하면서 최종 수요자의 필요를 만족시킬 것을 목표로 일을 해야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agency가 최종 수요자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협력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번역가가 그렇게 한다고 agency가 꼭 잘 되란 법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너무 기대하거나 그런 것에 목을 맬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런 agency의 입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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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의 필요


이제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런 agency에서 일하는 PM(project manager)의 필요를 생각해 봅시다(PM에 대해서는 초보 번역가를 위한 번역 비즈니스 용어 정리 참조). 무엇보다 기억할 것은, 번역가는 agency의 employee가 아니지만, PM은 철두철미하게 agency의 employee라는것입니다(hire와 employee의 차이에 대해서는 ‘번역 에이전시와 고객, 번역가의 상생 구조‘ 참조).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직장 생활을 좀 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agency가 아무리 매출이 늘어나고 수익이 증가하여 번창하더라도, PM의 급여가 그것에 비례하여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agency의 소유자 자신이 PM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작은 agency라고 해서 꼭 수준이 낮거나 나쁜 agency인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너무 절대화할 수는 없습니다.)

 

한 명의 피고용인으로서 PM이 번역가에게 원하는 것은, agency 소유자가 원하는 것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최종 수요자가 원하는 것은 더욱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PM에게는 물론 번역의 질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이차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이전시에 매일 출근해서 일하는 종업원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일을 효율적으로 빨리, 그리고 펑크나지 않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PM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면 번역가는 어떤 요소를 제공해야 할까요.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면서 생각해 보면 PM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원할듯합니다.

 

 

  • 자신이 처리해야 번역 작업이 있으면 그것을 최대한 빨리 어느 번역가에게 할당한다.

 

이러한 PM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면 번역가는 그들의 번역 작업 의뢰(translation request) 혹은 번역가가 그 작업을 맡을 시간이 있는지 알아보는 문의(availability check)에 기민하게 반응해 줘야 합니다. 할 수 있다면 확실히 할 수 있다, 할 수 없을 때는 확실하게 할 수 없다, 혹은 할 수 있지만 몇 가지 불확실한 것을 먼저 확인한 후에 최종적인 응답을 주겠다, 혹은 지금은 다른 작업이나 휴가 등으로 이 작업을 맡을 수 없다, 그런 식으로 분명히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응답을 주는 것입니다.

 

 

  • 자신이 맡고 있는 번역 작업이 펑크가 나지 않게 한다.

 

이러한 PM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면 번역가는 작업을 반드시 마감 시한(deadline) 안에 마쳐야 합니다. 만약 작업을 수락할 시점에 예상치 못했던 어떤 사정이나 어려움에 봉착한 경우에는 즉시 PM과 연락하여 마감 시한을 연장해 달라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다른 번역가에게 넘기도록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사실, 많은 PM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한보다 어느 정도 마감 시한을 당겨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agency가 최종 수요자에게 금요일 낮 12시까지 그것을 넘기기로 했다면 PM은 번역가에게 목요일 12시가 마감 시한이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이런 행동은 PM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왜 그러는지 좀 이해가 됩니다. 어쨌든 이런 현실에서, 번역가는 최대한 PM이 설정하고 자신이 동의한 마감 시한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하며, 불가피한 경우에는 PM과 다시 협상해야 합니다.

 

 

  • 자신이 맡고 있는 일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싶어한다.

 

어느 한 시점에 한 가지 프로젝트만 담당하고 있는 PM은 없습니다. 그들은 보통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고, 게다가 한 프로젝트에 적게는 서너 명, 많게는 수십 명의 번역가들이 연루됩니다. 여기다 proofreading 과정까지 더하면 PM이 출근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다루어야 하는 사람의 수는 정말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실수도 많이 합니다. 중국어나 일본어 번역 프로젝트를 한국어 번역가에게 보내기도 하고, 파일을 잘못 보내기도 하고, 파일 버전을 혼동하기도 하고, 심지어 번역가의 이름을 혼동하는 등, 그들이 바빠서 저지르는 실수의 종류는 참 많습니다.

 

이러한 PM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면, 번역가는 최대한 짧고 명확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합니다. 그들이 최대한 정확하고 간명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물론 적절한 때에는 농담을 주고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들은 agency 자체의 운명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직원들이며, 그들의 일을 간단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그들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대해야 합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번역가는 인터넷 시대의 번역 시장 구조 때문에 독특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고객이 이중적 혹은 삼중적이기 때문입니다(PM을 또 하나의 고객층으로 본다면). 번역가는 이런 상황을 잘 이해하고, 이 시장 구조에서 자신의 위치에서 시장의 가장 능동적인 player로 처신하고 상황을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Bryan
Bryan

브라이언은 의료분야에서 한영번역을 하는 번역가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내와 둘이 삽니다. 여행과 독서와 음악과 커피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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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번역가